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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25-28: 기도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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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7 ㅣ No.855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5) 기도의 싸움(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기도는 자신과 유혹자에 맞서는 싸움

 

 

“기도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인 동시에, 이 선물에 대한 우리들의 결정적인 응답”이라고 교리서는 밝힙니다. 기도가 우리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라는 점은 기도에는 노력이 따른다는 것을, 즉 “기도는 언제나 노력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2725항). 

 

그래서 기도는 일종의 싸움입니다.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교리서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또 유혹자의 계략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유혹자는 우리에게 기도를 외면하게 하고 하느님과 우리가 일치하는 것을 깨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기 때문에, 또한 사는 대로 기도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지적의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리스도의 성령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새 생활을 위한 ‘영적 싸움’은 기도의 싸움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반대(2726~2728항)

 

기도의 싸움과 관련해서 우선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은 우리 자신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도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견해들 가운데는 기도를 △ 단순히 심리적 활동으로 보는 견해 △ 정신적 공백 상태에 이르려는 집중 노력으로 보는 견해 △ 의례적인 태도와 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 기도와 일이 양립할 수 없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요? ① 이성과 과학을 통해 검증되는 것만이 참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서는 신비입니다. ② 사람들은 생산과 효율성의 가치만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비생산적이며 따라서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지요. ③ 이 세상의 사고방식은 관능주의와 안락을 진선미의 척도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기도는 관능주의가 아닌,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④ 기도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삶과 결별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와 관련, 배격해야 할 마지막 하나는 기도에 실패했다는 느낌입니다. ① 마음의 무감각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있고 ② 재산이 많기 때문에 주님께 다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일이 있으며 ③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는 때가 있습니다. 또 ④ 죄인으로서 무력감을 느껴 상처를 입은 자존심이 더욱더 완고해지는 일도 있고 ⑤ 기도가 무상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잘못된 반감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회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자면, “겸손과 신뢰와 인내로써 싸워야”(2728항)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1월 27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6) 기도의 싸움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기도할 때 겪는 네 가지 어려움

 

 

겸허한 경계심(2729~2733항)

 

기도할 때에 가장 흔히 겪는 어려움은 분심입니다. 분심이란 기도 중에 온갖 잡생각이 일어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는 기도를 바치는 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심이 생길 때에 “분심을 몰아내려고 쫓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됩니다”(2729항). 쫓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그냥 다시 처음 기도하는 상태로 돌아오면 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분심은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므로, 이것을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깨달으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우선적인 사랑이 일깨워질 것이다”(2729항). 내가 분심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다시 돌아와 마음을 집중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정화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분심에 빠져든다면 기도의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생기는 또 다른 어려움은 마음의 메마름입니다. 마음의 메마름은 특히 마음을 다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부닥치는 어려움입니다. “이 메마름은 관상 기도의 한 부분”(2731항)이라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메마를 때는, 생각도 기억도 느낌도 의욕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인 감흥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뇌와 무덤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참된 신앙의 순간”(2731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메마름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메마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마음의 메마름이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라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메마름은 시련을 만나면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8,13 참조). 

 

기도할 때에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유혹은 신앙의 부족입니다. 이는 가장 흔하면서도 매우 은밀하게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기도를 시작하지만 다른 급한 일이나 걱정거리가 떠올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또다시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는 마음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2732항)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한다고 했는데 믿음의 부족으로 근심거리가 계속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대해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주님을 우리 최후의 피난처로 여겨 그분께 갈 때에도, 우리는 참으로 그분을 믿는가?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 신앙의 부족, 곧 우리가 아직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2732항).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는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 안에 굳건히 머물러 있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게으름도 자주 빠지게 되는 유혹입니다. 게으름은 “금욕 정신이 해이하고 경계심이 감퇴되어 마음이 태만해짐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의기소침”(2733. 2755항)입니다. 자만 또는 교만함에서 빠지게 되는 유혹일 수 있습니다. 

 

교리서는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더 많이 다치게 된다”면서 “고통스러운 좌절감은 교만의 이면”이라고 지적합니다(2733항). 이런 유혹에 맞서 요구되는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비참함에 놀라지 않는다.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는 겸손한 사람은 더 깊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더욱 끈기있게 참아 견딘다”(2733항).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4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7) 기도의 싸움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시련 속에서 드러나는 신뢰

 

 

자녀다운 신뢰(2734~2741항)

 

난간 위에 아이가 있고 아래에는 아빠가 있습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걱정하지 말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대낮이면 아이는 별 걱정 없이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밤이라면 아이는 주저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이 신뢰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 속에서 드러난다”(2734항). 하지만 시련 속에서 신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기도를 그만두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 왜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우리는 보통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때에,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위주로 합니다. 우리 기도가 진정으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지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한 우리의 기도가 이뤄지는지 그 결과를 보아야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지요? 하느님을 우리가 바라는 바를 채워 주는 수단으로 여기는지요? 아니면 진정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이해하는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청원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워야만 하느님의 품위 있는 자녀들이 되기 때문”(2736항)입니다. 

 

나아가 교리서는 야고보 서간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밝힙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2737항; 야고 4,2.3 참조).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유의 성령과 함께 기도해야”(2736항) 합니다. “그분의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청원은 받아들여질 것입니다”(2737항).

 

2) 어떻게 효과 있는 기도가 되는가? 

 

기도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요?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업적”(2738항) 곧,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성부의 성실하신 사랑”(2739항)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효과 있는 기도가 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성실하신 사랑’을 굳게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서는 “기도하는 마음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청원에 대한 첫 번째 응답”(2739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리서는 나아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하는 기도는 유효한 청원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이롭도록”(2741항) 기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자녀다운 신뢰와 대담성을 지녀 예수님의 기도와 튼튼히 결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곧 모든 선물을 지니신 성령 바로 그분을 받게 된다”(2741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8 · 끝) 기도의 싸움(「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삶 살아야

 

 

항구한 사랑으로(2742~2745항)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언제나 감사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1테살 5,17; 에페 5,20; 6,18 참조). 기도에 대한 이런 지치지 않는 열성은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싸움은 겸손하고 신뢰하며 항구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벌이는 투쟁”(2742항)이며, 이 사랑은 기도에 대한 우리 믿음에 빛과 생명을 주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고 교리서는 가르칩니다(2743~2745항).

 

첫째, 기도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저잣거리에서나 혼자 산책할 때에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중에도, 또는 요리하는 중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곧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죄의 노예 상태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의 뛰어난 윤리신학자 알폰소 리구오리 성인은 “기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김없이 영벌을 자청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기도와 그리스도인 생활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과 기도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기도를 일과 결합시키고, 일을 기도와 결합시키는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2746~2751항)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되자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요한 복음 17장에 나오는 기도가 그것으로, ‘대사제의 기도’라고 하지요. “이 기도는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분리될 수 없고, 그분의 성부께 건너가심(파스카)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2747항). “이 희생 제사와 파스카의 기도 안에서 모든 것이, 곧 하느님과 세상, ‘말씀’과 살(肉), 영원한 삶과 시간,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과 사랑을 저버리는 죄, 이미 제자가 된 사람들과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람들, 자기 낮춤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된다”(2748항)고 교리서는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또한 ‘일치의 기도’로서 “창조와 구원 경륜 전체를 요약”(2758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20) 하고 우리를 위해 대사제로서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포함된 중요한 청원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 청원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하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하는 것,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구원 계획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악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정리합시다

 

- 우리의 청원이 들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올 때 우리의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복음서는 우리의 기도가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기를 권고합니다(2756항).

 

- 우리는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기도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2757항).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8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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