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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문화영성 산책: 침묵에 이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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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1 ㅣ No.812

[문화영성 산책] 침묵에 이르는 길



이번 호부터 다양한 문화에서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필자인 서울 불광동성당 주임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님은 오랜 기간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를 역임하셨고 가톨릭독서아카데미, 영성독서 지도자과정 등을 창립해 활발한 문화사목을 펼치고 계십니다. <편집자 주>


1. 침묵을 잃어버린 도시

우리는 각종 소음으로 가득 찬 시대에 살고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과 매연에 시달리고, 목소리 큰 사람이 성공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삶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도시 소음 속에 태어나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은 좀처럼 침묵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침묵에 대한 공포마저 느낀다. 심지어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미사전례 중에 휴대전화 벨소리는 침묵과 고요를 깨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기 일쑤다.

아파트, 도로, 골목길, 쇼핑센터, 극장, 회의실, 사무실, 식당, 지하철 등 언제 어디서나 소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천만 도시인이 서식하는 도시는 침묵을 잃어버리고 소음에 갇힌 공간”이라고. 이제 침묵을 잃어버린 그 자리를 대신하여 소음이 ‘도시인의 소리’로 들어섰고, 아예 소음에 중독된 삶을 살고 있다. 그만큼 도시공간이 속도와 빠름이라는 시간 개념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음속으로 비행할수록 하늘을 가르는 엄청난 소리를 내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삶, 바쁘게 사는 삶이 시끄러운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일상화된 소음의 문화는 점점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하여 ‘생각하지 않는 도시인’을 만들기 십상이다.


2. 침묵을 지향하는 건축

요즘 전 국토의 아파트화가 목표인양 여기저기 공사판이다. 주거할 공간의 절대 필요성에 부응한 현상이지만 획일적인 아파트 건물이 우후죽순 격으로 땅 위를 향한 ‘수직문화’로 나타나면서 점점 이웃 간 소통이 단절되고 소음에 따른 불협화음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층간소음’이다. 위층과 아래층 간의 불화가 생겨나고 급기야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소음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로, 갑과 을의 관계로 만들게 하는 아파트의 구조에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삶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웃과 자연을 배제한 아파트 건물은 숲을 방불케 할 만큼 빽빽이 들어서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콘크리트 건물들에서 참된 인간성은 상실해 간다. 요즘 힐링 산업(healing industry)이 유행하는 것은 자본과 권력을 상징하는 수직문화에서 탈피하여 자아를 찾고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여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수평문화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다. 물론 힐링이 문화코드로 상업화된 부정적인 면도 간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쉼, 틈, 여유, 여백, 비움, 침묵, 명상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긍정적인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얼마 전에 개인피정을 위해 머물렀던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은 가운데 네모반듯한 커다란 마당을 중심으로 주위를 둘러싼 건축 구조로 되어 있다. 수도원 한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움의 공간은 수사들에게 삶의 여유와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며 다양한 교류의 매개가 된다.

불광동 성당은 세속의 소음을 벗어나 침묵 속에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 되도록 설계된 건축물이다. 이 성전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세속과 성스러움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성당 앞이 통일로 대도로이고 언덕이라 수많은 차들과 복잡한 교통으로 엄청난 소음과 매연, 먼지투성이를 만들어내고 있기에 건물의 입구를 돌려세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복잡함 속에 있던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건축가가 만들어 놓은 호젓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 50여 미터 남짓한 이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속의 먼지를 털어낸다. 더군다나 십자가의 길이 있는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분 수난의 고통에 참여한다. 성전의 문을 여는 순간 마음속이 거룩하게 된다. 특히 올라오면서 야트막한 층계를 따라 걸을 때 자신도 모르게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마음이 정리된다. 하느님을 만나러 성전에 들어오기까지 침묵과 기도 속에서 천천히 성화된다.


3. 침묵은 하느님과 소통하는 공간

현실공간이든 일상화된 디지털 문화의 가상공간(인터넷, 소셜 미디어와 SNS 등)이든 소음문화를 피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소음의 식민지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인해 피로감에 심하게 노출되고,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화와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극단적으로는 ‘묻지마 살인’이라는 위험사회로 치닫는다.

이제는 자신을 돌아볼 침묵의 시간, 자신의 마음과 영혼에 비움의 자리인 침묵의 공간이 필요하다. 종교적으로 침묵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그분께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공간이다. 침묵은 내면의 소통 현상의 하나인 묵상 또는 명상을 할 수 있는 은신처가 된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침묵을 양심이나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여긴다. 그래서 침묵은 삶을 바꾸어 주는 힘이다.

이탈리아 수비아코에 가면 ‘베네딕토 동굴’이 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베네딕토 성인은 젊은 시절 로마로 유학을 갔다가 도시생활의 방종과 혼란에 회의를 느껴 수비아코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생활을 한 후 수도자로 거듭난다. 우리 모두에게도 베네딕토 동굴이 필요하다. 이 동굴은 고요함, 침묵의 장소를 상징한다. 침묵이란 동굴에 들어갈 때 세상의 소음이 멈추게 되고, 활동과 욕망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우리가 침묵이란 동굴에 들어설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올바로 들여다보는 성찰이 가능하다. 마치 맑고 고요한 호수가 하늘을 그대로 찍어내듯이 성찰은 또 다른 자신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대면하게 한다. 타자화된 자아를 볼 때 자신의 진면목과 마주치는 순간이 된다. 양심이 제대로 작동되는 사람은 이 순간 적나라한 자신을 보고 인정한다. 마치 아버지 곁을 떠난 작은 아들이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 돼지가 먹는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을 때, 가장 비극적인 고통의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발견한 순간 아버지께 잘못했음을 깨닫듯이… 참다운 성찰은 한 개인의 진정한 회개로 이끈다.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회개의 배경에는 침묵이 존재한다.


4. 침묵의 실천

침묵을 주제로 한 다큐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하나는 남자 수도자들의 삶을 보여 준 <위대한 침묵>(2005)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수녀들의 삶을 다룬 <사랑의 침묵>(2012)이다. 전자가 침묵에 무게를 두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후자는 수녀들의 수도생활 전반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인터뷰를 통한 그들의 신앙관을 엿보게 한다. 둘 다 수도원 생활이 얼마나 단순하고 단조로운가를 알려 준다. 세상에서 격리된 채 기도와 묵상, 일, 고행에만 전념하는 공동체이지만 복음의 진리라는 빛을 비추고, 침묵의 삶을 통해 교회와 세상을 정화하는 허파와 같은 기능을 한다.

매일 일정 시간 TV나 인터넷, 혹은 스마트폰을 ‘OFF’ 해 놓고, 음악도 듣지 말고, 단 30분만이라도 홀로 앉아 고요히 ‘침묵체험’을 해 보면 어떨까? 영적 독서나 성체조배를 통해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최소한 일 년에 한두 번 침묵피정에 참여해 보자. 침묵의 시간은 어두운 영혼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 영혼이 스스로 쇄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평신도, 2015년 봄호(VOL.47), 김민수 신부(서울대교구 불광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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