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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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다 더 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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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196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심각하다. 사회의 모든 면이 올바르게 서 있지 못하고 제 갈 바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의 역할은 더욱 커져 가야만 하고 그것도 세상의 구석지고 병든 곳을 찾아가서 고쳐 주는 의사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여 교회의 겉옷은 항시 더러워져 있어야 된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과 같은 사회에서 낙오된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며 또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회의 소명이다.

  물론 그렇게 교회가 한 사회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 설 때, 다시 말해 높은 언덕 위의 첨탑에서 벗어나 이 세상 가장 낮은 곳 진창에로 내려왔을 때, 그로 인해 교회가 거두게 될 눈에 보이는 성과와 업적이란 보잘 것 없을지도 모르고 또한 어느 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꼴이 되고 사실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세 속의 눈엔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교회와 세상 안에서 풍성하게 익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인간화와 복음화를 위해 세속의 바벨탑 꼭대기로 오직 향하고 있는 우리의 눈과 마음과 손을 울타리 밖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로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들에게로 다가갈 때 무엇보다 전제되어져야 할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들에 대한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의 깊은 이해심이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 존재이다. 이와 같은 인간존재의 특성에 따라 교회의 복지사업도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선교를 위해 세상에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분부하신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9-10)는 주님의 ’열 두 제자파견사’는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이 말씀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절대적 청빈에의 요구로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교회의 사업이 지향해야 할 참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로 ’아무 것도 받은 것 없는 데도 왠지 감사하고픈 마음이 솟구치고 마냥 좋아지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 교회가 그러해야 한다. 물론 물질적인 도움도 중요하고 또 현실적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명절 때 관변단체들이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위문품 던져 주듯 해서 이뤄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앙적 관점에선 헛된 짓일 따름이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다 안겨다 줄 ’금이나 은’같은 것을 굳이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 ’더 좋은 것’을 진고 있지 않다면 세속의 자선가보다 더 못한 꼴이 된다. 현대인들은 교회에 대해 세속적 물질 이상의 구 무엇을 바라고 있다. 바로 그것을 채워 주어야 한다.

  가난한 데다 마음마저 상처 입은 무수한 자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곁에 살고 있다. 그들의 가난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모순의 구조적 악과 오도된 사회의식에 의해 초래되고 강요된 이 가난은 한이 낳았고 악을 낳는 그런 가난이다. 따라서 교회는 물질적인 무언가를 안겨다 주려고만 안달하기 보단 우선 그들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나누고 인격적으로 깊이 결합되면서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교회 자체가 가난으로 육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인류의 벗’이 되어야 한다.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는 교회사업의 근본성격도 그러하다. 온갖 좋은 것을 "거져 주시는" 하느님께 모든 원천을 두는 까닭에 우리의 사업도 "거져 줄 수 있는" 아가페적 차원에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업이 그처럼 영성화되지 못한다면 그 결실 역시도 땅의 것일 따름이다.

  진정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것은 교회에 주어진 소명의 본질적 요소가 불변함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교회는 부유하셨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주님을 따라 자신을 온전히 비워 가난한 눈과 마음과 손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교회 복지사업의 근본정신은 그러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의 사업이 펼쳐지는 그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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