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안익태 리카르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18 ㅣ No.97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9) 안익태 리카르도 (상)


애국심에 벅차올라 힘차게 부를 애국가를 작곡하다

 

 

-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앨범 표지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나의 서재에는 오래전에 구입한 안익태(리카르도, 安益泰, 1906-1965)의 ‘한국환상곡’(Symphonic Fantasia KOREA) LP판이 있다. 커버에는 안익태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흑백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발매한 것으로 3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 레코드는 안익태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한 것인데 할리우드 야외음악당에서 녹음했다. 그동안 ‘한국환상곡’을 듣고 싶었으나 턴테이블이 없어 듣지 못했다. 안익태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큰마음 먹고 턴테이블 하나를 구입했다. 역시 LP판으로 듣는 ‘한국환상곡’은 달랐다. 이 곡은 안익태가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해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안익태 지휘로 초연되었다. 짧은 곡이지만 고조선 개국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통, 독립을 위한 투쟁, 광복의 기쁨, 참혹한 한국전쟁을 다양한 악기로 표현했다.

 

안익태는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작곡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일제강점기에 애국지사들이 부른 애국가는 지금의 ‘애국가’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의 애국가였다. 2021년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식에서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가 제창되었다. 안익태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말했다.

 

 

독립의 노래, 통일의 노래, 조국의 노래

 

“‘애국가’는 한마디로 애국심이 치솟게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슬픈 데가 조금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동 · 해 · 물과’하고 활발하게 끊어가면서 힘차게 불러야 합니다. … ‘애국가’만은 애국심이 마음속에서 우러나도록 우렁차게 불러야 합니다.” 한 역사학자의 말대로 ‘애국가’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광복군에게는 ‘독립의 노래’로, 해방 후 분단된 조국에서는 민족의 통일을 기약하는 ‘통일의 노래’로, 이역만리 타향에서 눈물짓던 동포들에게는 ‘조국의 노래’”였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

 

안익태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서 음악을 배웠다. 일본으로 유학 간 형이 일곱 살 어린 동생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해 주었다. 바이올린을 혼자 연습해 찬송가를 연주했다. 그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안익태가 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형은 빅터레코드 축음기를 사주었다. 트럼펫과 비슷하게 생긴 코넷도 배워 평양에서는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워낙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숭실학교(중등교육기관)에 입학해서도 숭실대 밴드부에 입단해 활동했다. 또 형은 안익태에게 첼로를 선물했다. 그 첼로가 안익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안익태는 첼로도 혼자서 공부했다. 형은 안익태가 서울에서 영국인 첼리스트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났다. 숭실학교는 3·1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숭실학교는 초토화되었다. 안익태는 3·1운동 수감자 구출 운동에 가담했다. 그것이 발각되어 퇴교당했다. 그 후, 안익태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첼로 전공으로 입학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오직 음악에만 열중해 공부했다. 그런데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학비 조달이 어렵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안타깝게 ‘졸업 유예’가 되었다. 그때 미국인 선교사로 일본에 거주하며 메이지대학 피아노 교수였던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안익태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덕분에 안익태는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동포들의 선물, 만년필

 

귀국한 안익태는 국내에서 여러 차례 음악회를 열어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발표했다.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남아 있던 논밭을 모두 팔아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익태는 한인교회를 찾아갔다. 한인교회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안익태를 돕기 위한 음악회였다. 안익태는 교회 강단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보았다. 그러고는 교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때의 음악회 감격을 안익태는 이렇게 말했다. “강단 위에 올라가 20여 명의 동포 앞에서 약 반 시간 동안 연주하는데 … 동서 사방으로 헤매는 불쌍한 우리 2000만 동포 앞에서 연주하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곳 한인 신자들과 함께 부른 애국가는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였다. 안익태는 술집에서나 부르는 남의 나라 민요를 우리나라 애국가로 부르는 것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새로운 애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했다.

 

안익태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때 교인들은 애국가 작곡에 사용하라고 만년필을 선물했다. 그 만년필은 애국가를 작곡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안익태는 이 만년필을 평생 간직했다. “내가 1930년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동포들은 돈을 모아서 나에게 10불짜리 파카 만년필을 사주었는데, 그때 동포들은 이 만년필을 나에게 주면서 이걸 가지고 애국가도 작곡하고 좋은 곡을 많이 쓰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 후 동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만년필로 정성 들여 ‘애국가’를 작곡하였다.”(신한민보에 실린 안익태의 ‘대한국 애국가’에서) 안익태의 이 만년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치에게 이용 당한 안익태

 

안익태의 영어 이름은 ‘Eaktay Ahn(에키타이 안)’이다. 안익태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 다니면서 연주 활동을 할 때 사용한 이름은 ‘안 에키타이’였다. ‘안익태’를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었다. 이를 다시 서양식으로 바꾼 것이 ‘Eaktay Ahn’이다. 안익태는 ‘안’씨 성을 바꾼 적도 없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안익태를 친일 음악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익태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에서 일본 왕에게 바치는 노래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했는데, ‘한국환상곡’도 ‘만주국 축전곡’과 비슷하므로 ‘한국환상곡’ 역시 일본 왕에게 바치는 노래와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가 ‘한국환상곡’ 안에 들어있기에 ‘애국가’를 부르면 결국 일본 왕을 찬미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주장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더는 부르지 말아야 한다며 안익태의 친나치 행적까지 파헤친 책까지 출판되었다. 안익태가 대형 일장기와 만주국 국기 밑에서 베를린교향악단과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하는 영상도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본 국민들은 경악했다. 당시 나치는 이 공연 장면을 선전용 필름으로 만들어 유럽 전역에 배포했다. 이것은 나치의 나팔수 괴벨스의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선전) 전술이었다. 안익태는 나치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안익태는 일본 도쿄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 연주는 ABC교향악단이, 합창은 일본인합창단이 맡았다. 안익태는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쿄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면서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애국가를 한국말로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의 만족감이란 한국에서 느꼈던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고의 감격적인 만족이었소. …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軍刀)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오. 지휘봉을 드니까 두말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오.”(‘나의 남편 안익태’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0월 15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0) 안익태 리카르도 (하)


직접 작곡한 묵상곡 들으며 하느님께 기도한 안익태

 

 

후기 낭만파 거장의 유일한 동양인 제자

 

안익태(리카르도, 安益泰, 1906~1965)는 독일 최고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 안익태와 슈트라우스의 첫 만남은 안익태가 음악학교 연습실에서 자신의 곡 ‘강천성악(降天聲樂)’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슈트라우스가 지나가다 그 음악을 들었다. 슈트라우스는 안익태가 작곡한 동양의 신비한 음률에 깊이 감동했다. 그는 당시 나치에게 협력한 대표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안익태가 비엔나에서 지휘한 ‘일본 축전곡’(슈트라우스 작곡)을 관람한 후에 안익태에게 ‘지휘자의 능력을 깨끗이 인정한다’는 친필 서명 악보를 건네주었다.

 

음악사에서 보면 슈트라우스는 후기 낭만파의 거장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 구스타프 말러, 클로드 드뷔시가 살았다. 슈트라우스의 동양인 제자로는 안익태가 유일했다. 슈트라우스는 안익태를 무척 아꼈고, 안익태는 슈트라우스를 무척 존경했다. 그래서 안익태는 스승의 전기인 「라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집필했다.

 

분명히 슈트라우스는 나치 시대에 나치에게 협력한 인물이다. 그 시대는 슈트라우스를 비롯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쇼스타코비치 등의 세계적인 음악가들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나치 정권과 공산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지금 세계인들은 그들의 음악을 이념에 편향되지 않고 즐겨듣고 있다. 안익태 역시 일본의 강압으로 협조한 활동이 적지 않다. 이것은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조부 장례식도 빠진 안익태의 열성팬

 

안익태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가고파’, ‘목련화’, ‘봄이 오면’ 등의 가곡으로 유명한 작곡가 김동진(전 경희대 음대 학장)은 숭실학교에 다닐 때부터 안익태를 흠모했다. 안익태의 첼로 연주는 평양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안익태의 첼로 독주회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김동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례식 날이 안익태의 첼로 독주회가 있는 날이었다. 김동진은 할아버지 장례식을 뒤로 미루고 독주회에 갔다. 독주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작은아버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작은아버지한테 회초리를 호되게 맞았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해인가 육해공군 합동 연주회가 있었는데 육군 군악대원 한 명이 클라리넷을 잃어버렸다. 안익태는 그 사실을 군악대장에게 듣고는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며칠이 지난 다음에 안익태는 미8군에서 클라리넷을 구해 가져왔다. 그러고는 군악대장에게 건네주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감격했다. 안익태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스페인 마요르카의 안익태 거리

 

안익태가 거주한 곳은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이었다. 그곳을 거처로 정한 것은 우리나라 풍경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나름대로 달랠 수 있었다. 마요르카는 지중해의 낙원이라 불린다. 마요르카는 쇼팽과 조르주 상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쇼팽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곳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쇼팽은 그곳에서 ‘빗방울’이란 작품을, 상드는 ‘마요르카의 어느 겨울’이란 작품을 썼다.

 

마요르카는 가톨릭과도 관계가 깊다. 마요르카와 조금 떨어진 수도원에서 가톨릭 꾸르실료 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 마요르카는 전 세계 모든 꾸르실리스따(꾸르실료 교육을 수료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후에 안익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창설해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다. 스페인 정부는 안익태의 공로를 인정해 ‘스페인 문화상’을 수여했다. 이를 계기로 마요르카에 ‘안익태 거리’가 생겼다. 그곳에 안익태 탄생 110주년을 맞아 ‘안익태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안익태가 가톨릭대의대 교가를 작곡하기로 한 것을 기념해 1955년 4월 노기남 대주교 주교관에서 한 기념 촬영. 오른쪽부터 가톨릭대 의학부장 박양운 신부, 노기남 대주교, 안익태 등이다.

 

 

음악 통해 하느님을 알리는 소명

 

안익태는 유교에서 시작해 개신교를 믿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안익태는 ‘음악은 하느님의 영감을 인간에게 전하는 신의 메시지이며 자신의 소명은 음악을 통해 하느님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가톨릭 대회에서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일명 ‘합창’)을 지휘했다. ‘합창’은 독일의 시인 실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가톨릭 성가(401번) ‘주를 찬미하여라’에서 ‘환희의 송가’를 들을 수 있다.

 

안익태는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살레시오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 앞에서 애국가를 지휘했다. 동행한 그의 부인 로리타 안 여사는 이를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했다. 또한 안익태는 광주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를 방문했을 때 수녀들과 즉흥적으로 음악 발표회를 가져 주위를 놀라게 했다. 더욱 놀랐던 것은 서울에서 열린 국제음악제에 그 수녀합창단이 무대에 선 것이었다. 발표한 곡은 ‘아베 마리아’를 비롯해 ‘라 수페란자’, ‘레지나 첼리’, ‘아니마 크리스티’ 등이었다. 공연은 국제음악제 책임자였던 안익태가 음악제 프로그램에 수녀합창단의 이름과 곡명을 적어놓고 광주대교구 대주교에게 간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안익태는 이전에 수녀원 허원식에서 수녀들의 성가 합창을 듣고는 무척이나 감동했었다. 그러곤 세계적 수준의 훌륭한 합창단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딸과 주일 미사 참여 가장 좋아해

 

부인 로리타 안 여사는 안익태를 ‘크게 드러남 없이 잔잔히 신앙생활에 몰입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또한 “남편은 자신이 작곡한 묵상곡을 들으면서 주님의 기도를 외웠으며, 딸 레오노르 안 양과 함께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기뻐했다”고 했다. 안익태는 스페인에 거주하면서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부인과 자녀도 한국 국적을 그대로 지녔다. 안익태는 1962년에 고국을 방문해 애국가를 지휘했는데 지휘하기 전에 십자성호를 그었다. 그의 가톨릭 신앙이 애국가에 그대로 담겨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애국가 가사를 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에서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작사된 것도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뜻일 것이다.

 

 

명동대성당에서 장례 미사

 

안익태는 이승만 대통령과 각별했다. ‘이승만 대통령 탄신 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야하자 박정희는 5·16군사혁명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앞서 얘기한 서울국제음악제는 안익태가 주관했는데 박정희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안익태는 국제음악제를 비롯한 국립교향악단 창단, 국립음악학교 설립 등을 주도하면서 국내 음악인들과 심하게 갈등을 빚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네 번째 국제음악제가 무산되면서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안익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병은 악화되었다. 병 중에도 런던뉴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휘 내내 고열과 통증에 시달렸다. 결국 안익태는 간경화 진단을 받고 바르셀로나에서 5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익태는 생전에 ‘죽으면 뼈라도 고국에 묻어달라’고 했다. 안익태의 유해는 세상을 떠난 지 1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위령 미사를 집전했다. 김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안익태 선생의 작곡과 시와 편지 속에 나타나 있는 조국과 겨레에 대한 ‘사랑’을 우리 맘속에 새겨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안 선생은 모든 악기가 고유의 음을 살림으로써 더욱 화음이 되는 교향악이 되듯이 민족 단합과 평화와 인류 세계가 그렇게 되길 기대했다”고 했다. 안익태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베를린필하모니, 베를린방송교향악단,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런던필하모니오케스트라, 런던뉴필하모니오케스트라, 더블린방송교향악단, 로마방송교향악단, 취리히방송교향악단, 마요르카교향악단, 루가노방송교향악단, 동경심포니오케스트라 등 이 모든 오케스트라를 한국인 마에스트로 안익태 리카르도가 지휘했다.

 

참고자료: ▲ 김형석.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교음사. 2019 ▲ 「월간조선」 2019년 12월호 ‘예술가 6인의 추모글에서 나타난 안익태의 애국과 극일’ ▲ 문성모 「우리나라 애국가 이야기」 가문비. 2021 ▲ 안익태·야기 히로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달아실. 2021 ▲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 가톨릭신문(2007.4.8) ‘교회 유물 기증 김인순 할머니 “애국가에 담긴 신앙 알리고파”’ ▲ 가톨릭신문(1994.2.20.) ‘KBS 교향악단·서울 시립합창단 협연 안익태 음악제 개막’ ▲ 가톨릭신문(1993.11.7) ‘안익태 선생 미망인 로리타 안 여사’ ▲ 가톨릭신문(1992. 8.16) ‘고 안익태 선생 기념관 우리 손으로 보존하자’ ▲ 가톨릭신문(1988.3.6) ‘꾸르실료의 요람 마요르카’ ▲ 가톨릭신문(1977.7.17) ‘애국가 작곡자 고 안익태 선생, 작고 12년 만에 말없이 환국’ ▲ 가톨릭신문(1963.6.2) ‘까리따스 수녀회 합창 인기 얻어’ ▲ 가톨릭신문(1962.2.25) ‘안익태 씨를 찾아서’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0월 22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4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