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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인간 세상의 고통과 죄...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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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02 ㅣ No.1712

[복음으로 세상 보기] “인간 세상의 고통과 죄...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요즈음 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수난하심을 아파하는 마음으로 감동하고, 더 나아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본받고 일치하기 위해 회심하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하기를 청하는 은총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사순의 시기에 우리는 자주 인간 세상의 고통과 죄에 관련하여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이러한 의문은 특별히 가정의 우환과 온갖 고난의 아픔을 하소연 하는 신자 분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드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또한 왜 인간 세상에 선한 것만 창조하지 않으시고, 악한 것들도 허락하시어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죄들이 만연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부서진 틈새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

 

얼마 전 다른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었던 인상적인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신부님은 시애틀 대학에서 영성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어느 수녀님께서 경험하신 일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셨습니다. 하루는 수녀님의 수업 중에 자신의 영적 여정을 상징하는 것들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어느 한 친구가 자신의 부서진 삶을 담담하게 나누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장애로 다리를 많이 절던 그 친구는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솔직한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였다가 자신의 교회와 집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면서, 자신이 가져온 부서진 꽃병 조각을 얼기설기 맞추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부서지고 어그러진 꽃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교실의 불을 끄고 그 꽃병 한가운데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자, 어둡던 교실은 부서진 틈새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으로 인해 환해졌다고 합니다. 그때 수녀님께서 깨닫게 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빛은 우리의 부서짐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저는 점점 상처받은 사람들, 부서진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찾고 또 보기 시작했습니다. … 고통 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은 사람마다 그 고유의 향기와 무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픔 속에 흐르는 눈물은 영혼을 씻어주고, 또 남을 보듬는 힘을 주며, 단단한 나의 자아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부서진 것은 아름답고, 그 부서짐 속으로 걸어가는 우리의 걸음은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내딛는 내면의 행진입니다.”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 뜻하지 않은 아픈 일들, 이러한 것들은 겪지 않으면 좋으련만 일상에서 어쩔 수 없게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영적인 겸손의 여정으로, 또한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통해 다른 이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하고 함께하여 줄 수 있는 너그럽고 따듯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어려움과 어두움의 시간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시는 주님이 함께 하심을, 주님의 자리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도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과 시련들은 인간적인 눈과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어두움이고 그 자체로 인생의 마이너스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신앙의 눈과 긍정적으로 그 아픔을 견디어 내고자 노력하는 이에게는 상처 깊은 아름다운 빛이고, 은총의 시간으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

 

 

베드로와 유다: 회심과 후회

 

사순시기에 죄를 묵상하며, 자주 떠올리는 예수님의 제자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베드로와 유다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주님의 제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주님을 배반합니다. 유다는 주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기고(마태 26, 14-16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사람들에게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마태 26, 69-75 참조) 그러나 두 제자의 최후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으뜸 제자로,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죄로 생을 마감합니다. 두 제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리라는 주님에 대한 믿음, 내어맡김이 있었지만, 유다는 자신이 스스로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판단으로 인한 불신앙과 내어맡기지 못함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자신의 어둠인 죄를 통하여 빛이신 주님께 나아갑니다. 즉, 자신의 어둠인 죄를 빛이신 주님 안에서 바라보며 회심으로 나아갑니다. 죄로 죽었다가 주님 자비 안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다는 자신의 죄를 주님 사랑의 시선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상처 난 마음을 어둠 안에서 바라봤기에 죽음을 선택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즉, 세상의 어떤 큰 죄도 주님의 자비보다 크지 않음을 알고 믿지 못했던 유다는 회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후회 안에서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와 유다의 차이는 바로 회심과 후회입니다.

 

얼마 전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베드로와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던 그 시간에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어리석음에 마음 안타까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도록, 즉 회심하도록 기도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죄는 물론 악이고 우리들의 삶에 필요치 않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에 우리 주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라는 한줄기 빛을 내리시고, 그 죄를 통하여 당신을 찾고, 당신께 나아와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단련되어 당신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 20)

 

 

나는 내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14세기 영국의 신비주의자였던 노리치의 줄리안은 “나는 내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나는 하느님이다. 보아라! 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보아라! 나는 모든 것을 행한다. 보아라! 나는 결코 내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떼지 않을 것이다. 보아라! 나는 태초부터 정해놓은 그 목표를 향해 권능과 지혜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끈다. 그러니 무엇이 잘못될 수 있겠느냐?”

 

짧지만 우리 삶 안의 고통과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작품에서 결코 손을 떼지 않을 것이기에 그 어떤 피조물도 잘못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고 또 포기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고통으로 인하여, 죄로 인하여 어둡고 절망적이고 잘못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움도 주님을 거쳐서는 빛이 될 수 있고, 죄를 통하여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어둠속에서 빛이 환희 빛나듯, 우리들의 어두운 고통과 죄들 안에서 주님 사랑과 자비와 희망의 빛은 아주 밝고 따듯하고 감사로울 것입니다.

 

“오늘 서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마태 6,30)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3월호, 이광휘 신부(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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