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이주사목] 환대와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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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20 ㅣ No.1144

[길을 나서는 교회] 환대와 연대

 

 

예멘 난민 사태

 

2018년 제주도에 예멘 출신 난민 500여 명이 입국해 난민 지위를 요청하면서 우리 사회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겪지 않았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예멘인의 난민 지위 인정과 관련한 의도적인 가짜 뉴스와 이슬람과 난민을 차별하는 혐오스러운 표현이 여러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난민을 한 명도 수용하지 않은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난민’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500여 명이 마치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불순분자처럼 여겨진 듯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이는 2018년 5월까지 40,470명이다. 그 가운데 4.1%인 839명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고 1,549명이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았다.

 

난민 유입을 인종 차별과 혐오 수준으로 반대하는 세력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난민이 국민의 일자리를 잠식해서 청년층과 실업자의 취업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난민의 취업은 농 · 축 · 수산업, 건설 일용직과 요식업 등 우리 국민이 취업을 기피해서 인력이 부족하고 국민 일자리의 잠식 가능성이 적은 업종으로 제한하고 있다.

 

 

고용 허가제와 이주 노동자

 

난민이 국내에서 취직을 허가받는 업종은 제조업과 건설업, 농·축산업, 어업, 서비스업이다. 이 업종에는 국내 노동자보다는 외국인 노동자가 더 많이 일한다.

 

1993년부터 ‘산업 연수생 제도’를 통해서, 지금은 ‘고용 허가제’를 통해서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베트남, 몽골,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파키스탄, 중국, 방글라데시, 키르기스스탄, 네팔, 미얀마, 동티모르 노동자들이 일한다.

 

이주 노동자는 한국에서 3년을 체류하며 일할 수 있고, 1회에 한해서 2년 미만으로 취업을 연장할 수 있다. 5개 업종이 아닌 사업장에서 일하는 것은 허가되지 않는다. 만일 허가된 업종이 아닌 곳에서 임의로 업종을 변경하여 일하면 고용 허가는 취소되고, 미등록 외국인(불법 체류자)이 되어 법무부의 단속을 피해 숨어 다녀야 한다.

 

국내의 이주 노동자 수가 25만 명 정도라고 하지만 미등록 노동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상당히 많다고 한다. 이주 노동자 대부분은 제조업에서 일하지만, 최근에는 농어촌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 농촌과 어촌에 가면 심심찮게 외국인을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의 노동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편의와 임금을 제대로 받고 있지만, 한국 사람이 기피하는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때론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쌍욕을 비롯해 인격 모욕 등의 언어 폭력, 성폭력, 임금 착취와 체불, 쉬는 시간이 없는 노동 시간, 집단 수용소나 다름없는 합숙소 등 열악하다 못해 인격 존중을 기대하기 어려운 노동 현장도 있다.

 

 

심판의 기준, 환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데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주 노동자를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또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관심해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 주님 앞에서 우리의 무관심을 이렇게 변명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마태 25,44)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가난한 사람, 세리, 죄인들의 친구이셨던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께서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 22,20; 23,9).

 

이방인과 나그네에게 잘해 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찾아온 나그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사악을 얻었다(창세 18,1-15 참조).

 

만일 아브라함이 주님의 천사인 그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에 하셨던 하느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찾아온 손님인 이주 노동자와 난민을 잘 대해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연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예수님의 행동을 교회가 그대로 따라서 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세리와 가난한 사람, 과부, 병자 등 이른바 죄인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셨다(마르 2,13-17 참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시거나 편들어 주셨다(루카 5,31-32 참조). 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를 들어 레위나 사제의 행동이 아니라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연대한다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다. 함께하려면 먼저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공동 책임을 느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공동 책임이 있다.

 

함께 살아가는 책임감에서 불쌍히 여기는 애처로운 마음이 생기고,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이 사람과 함께하는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연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이주 노동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우리가 기피하는 곳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연대해야 한다.

 

연대하려면 먼저 이주 노동자의 삶을 잘 알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차별하거나 소외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이해야 한다. 또 내국인과 같은 노동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도와주는 데도 함께해야 한다.

 

[경향잡지, 2019년 1월호, 송년홍 타대오(전주교구 호성만수성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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