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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89: 18세기 (6) 미국 가톨릭교회 영성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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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25 ㅣ No.124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9) 18세기 ⑥ 미국 가톨릭교회 영성의 배경


신대륙에 뿌린 복음의 씨앗… 미국 교계제 설립으로 결실

 

 

18세기 후반 서양 세계는 양대 자유 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 독립혁명(The American Revolution, 1775~1783)’이었고, 두 번째는 ‘프랑스혁명(Rvolution Franaise, 1789~1794)’이었습니다. 양대 혁명은 세상에 속한 사건이었지만, 가톨릭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두 나라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처신에 따라 외형적으로 전혀 상반되는 결과가 있었습니다.

 

- 미시간 원주민들을 선교하다 순교한 예수회 선교사 조게(가운데)와 동료 순교자들.

 

 

스페인의 원주민 선교와 선교사 순교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도록 후원했던 스페인은 16세기 탐험가들과 군인들을 앞세워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신대륙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1530년대 스페인 선교사들은 멕시코 만 연안(Gulf Coast)의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후안(Juan de Padilla, 1500~1542)은 서쪽 지역인 뉴멕시코에서 선교를 시작했고 원주민들도 그를 환대했으나, 1542년 적대적인 부족을 만나 캔자스에서 살해돼 북아메리카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됐습니다. 1610년 뉴멕시코에 ‘산타페(Santa Fe)’라는 도시가 조성됐는데, 당시 설립된 ‘성 미카엘(San Miguel)’ 경당이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경당이 됐습니다.

 

도미니코회 선교사 루이스(Luis de Cncer, 1500~1549)는 1549년 플로리다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다 순교했습니다. 스페인 해군 제독 페드로(Pedro Menndez de Avils, 1519~1574)는 1565년 플로리다 지역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도시를 조성했는데, 그곳에 설립된 ‘하느님의 이름(Nombre de Dios) 성당’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이 됐습니다. 1560년대 후반 예수회 선교사들도 플로리다에 도착해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는 1675년 텍사스에서 첫 선교를 시작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1768년 선교를 계획했습니다.

 

1661년 위스콘신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 예수회 선교사 메나르를 담은 스테인드 글라스.

 

 

프랑스의 원주민 선교와 현지 사제 양성

 

프랑스는 17세기 신대륙을 조사하기 위해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을 파견했습니다. 프랑스 선교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통해 오대호를 거쳐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이뤄졌습니다. 1630년대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캐나다에서 첫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1640년대 예수회 선교사 조게(Isaac Jogues, 1607~1646)는 미시간 원주민들을 선교했습니다. 1642년 모호크족 원주민에게 잡혔던 조게는 네덜란드인에 의해 구출돼 프랑스로 귀국했는데, 1646년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다시 신대륙에 왔다가 결국 원주민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메나르(Ren Mnard, 1605~1661)는 1661년에 위스콘신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으며, 1660년대 후반 미시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굳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르케트(Jacques Marquette, 1637~1675)는 처음으로 1673년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한편, 퀘벡 신학교를 졸업한 사제들도 1689년부터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 선교를 왔으며, 1899년 일리노이에 성 가정 본당을 설립했습니다. 1727년 프랑스 루앙에서 온 우르술라회(Ursulines) 수녀들은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착한 수녀들이었는데, 뉴올리언스에서 소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영국 개신교 중심 선교 사이에 가톨릭 선교

 

영국은 17세기 아메리카 동부 해안 지역에서 개신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조지 칼버트(George Calvert, 1580~1632)는 영국 왕 제임스 1세(James I, 재위 1603~1625)에게 메릴랜드에서 영국 식민지를 개발할 권한을 약속받았으나 후임 왕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1649)가 공식 문서를 주기 직전 사망했습니다. 1632년 장남인 세실 칼버트(Cecil Calvert, 1605~1675)가 그 권한을 물려받았으며, 이듬해 동생 레오나드(Leonard Calvert, 1606~1649)를 메릴랜드 식민지 정부 관리로 임명하고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34년 메릴랜드 앞에 있는 세인트 클레멘스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동행한 예수회 선교사 화이트(Andrew White, 1579~1656)가 식민지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으며, 얼마 후 세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세인트 매리 타운에서 영국령 첫 번째 가톨릭 종교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1653년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뉴타운 매너에서 영국령 첫 번째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1720년대 예수회 선교사 조셉 그리턴(Joseph Greaton, 1679~1753)은 영국 식민지 지역에서 선교 여행을 하다가 1729년에 필라델피아에 정착해 1730년대에 영국령 첫 번째 경당을 설립하고 가톨릭 신자들이 공적인 전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북아메리카 첫 순교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후안.

 

 

미국 첫 번째 교계제도 설립

 

1776년 미합중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 직전 가톨릭교회는 유럽에서 온 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합중국 건립 이후 존 캐롤(John Carroll, 1735~1815)이 여러 나라 수도회가 각자 책임지고 있는 미국 가톨릭교회를 하나로 통일할 계획을 교황청과 의논하면서 1783년에 미국 최고 장상(superior)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교황 비오 6세(Pius PP. VI, 재임 1775~1799)는 1784년 존 캐롤을 첫 번째 장상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성직자들은 유럽에 종속되기 싫어하는 미국의 분위기를 고려해 자신들이 선출한 인물을 주교로 임명해 주길 강력하게 건의했습니다.

 

교황청이 미국 가톨릭교회 요구에 동의함으로써 미국의 성직자들은 1789년 존 캐롤을 주교로 선출했고, 미국 첫 교구로 볼티모어 교구가 설정되면서 미국에 공식적인 교계제도가 설립됐습니다. 볼티모어 교구는 20여 년 만에 대교구로 승격하고 하위에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켄터키 바즈타운 교구를 두게 됐습니다. 비록 미국 성직자들이 첫 번째 주교를 스스로 선출했지만, 미국 가톨릭교회는 독립혁명 정신에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교황청과 일치하고 보편 교회의 가르침도 잊지 않음으로써 가톨릭 신앙과 영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북아메리카의 가톨릭 신앙은 스페인, 프랑스,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 확장되고 유지됐습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로 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노력을 했으나 영국 선교사들은 영국이 설립한 식민지에 정착했던 유럽 출신의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활동했습니다. 결국, 북아메리카에도 가톨릭 신앙이 잘 정착됐으나, 미국 가톨릭교회는 개종한 원주민들보다 유럽 출신의 영어권 백인 신자들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26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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