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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제주 4·3,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제주 4·3의 배경과 현대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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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1503

[경향 돋보기 - 제주 4·3,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제주 4·3의 배경과 현대사적 의미

 

 

2만 5천-3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제주 4·3사건, 그 배경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혀 있어 하나의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쉬운 문제일 리가 없다. 4·3이 ‘사건’이나 ‘봉기’, ‘투쟁’, ‘폭동’, ‘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나먼 고려 시대 이래로 숱한 제주 민란과 항쟁이 불의와 학정에서 비롯되었듯이, 4·3에도 그것이 무엇이든 그럴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종래의 글과 달리 4·3 전체가 아닌 바로 그 전날까지의 제주만을 들여다보는 이유이다. 4·3이 발발했다면 그 이전에 그런 배경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4·3의 진실도 깃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 지난날의 데자뷔

 

해방 제주, 가난과 실업은 여전히 심각한 경제 문제였다. 황폐한 섬에서 사람들은 절박했던 생필품을 들여오려고 지난날의 일본 교역로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차단된 이 밀교역은 당국의 단속을 피해야 했던 불법이었다.

 

제주에는 이런 단속을 빌미로 소중한 생필품을 착취하는 모리배들이 있었다. 이 집단에는 미군정 관리는 물론 경찰로 변신한 지난날 ‘일제 순사들’과 우익 단체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재일 제주인들이 고향 마을에 전기를 가설하라고 보내 준 선량한 물건까지 노렸다. 제주 사람들이 “모리배의 철저한 소탕!”이란 구호를 내걸었던 건 이런 분노 때문이었다. 제주 사람들이 해방 공간에서 느낀 건 지난날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불의였다.

 

피폐해진 일상에 또 다른 고통을 가한 것은 식량 문제였다. 민심을 자극한 건 잘못된 미군정의 정책이었다. 미군정은 지난날 일제가 행하던 공출 제도 같은 ‘미곡 수집령’을 공포하였으나, 이 제도는 제주 사람에겐 악몽이었다. 공출로 밥조차 먹기 힘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이 분노하여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곳곳에서 관리들과 충돌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주 사람들이 느낀 건 지난날의 부당한 수탈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런 사회 경제적 굴곡 속에서도 두드러졌던 건 교육 열기였다. 마을마다 자치적으로 국민학교 설립 운동이 전개되고, 면 단위별로는 중등학교 설립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런 신교육의 세례와 함께 의식은 깨었고, 일제 잔재 교육을 반대하는 동맹 휴학과 양과자 수입 반대 시위라는 사회 운동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특히 좌·우파를 아우르는 양과자 수입 반대 시위는 전국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이 반대 시위에 호응한 것은 “일제의 신 개화와 함께 들어온 눈깔사탕을 먹다가 망해 버린 경험을 잊지 말자.”는 민족주의적 호소 때문이었다. 제주 사람들이 뜨거운 교육 열기와 함께 깨닫게 된 건 민족적 자주 의식이었다.

 

독버섯처럼 퍼지던 이런 부패와 수탈에 대한 반발과 민족적 자주의식의 각성은 전국적 현상이면서, 4·3 전야까지 이어지는 제주 민심이기도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듯, 해방은 참해방이 아니었다. 이런 아픈 민심을 헤아리고 불의를 제거하는 것이 권력의 책무였을 터지만 이건 4·3 전야까지 사라지지 않는 문제였다.

 

 

조국의 미래에 대한 민심

 

해방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중대한 전기로 믿었다. 그러나 승전국들의 회의 탁자에 올라간 건 신탁 통치안이었다. 민족 지도자 김구나 이승만 등이 반탁 대열에 합류한 건 그 때문이었다. 1946년 1월, 제주에서도 이에 호응하며 대대적인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궐기 대회가 개최된다.

 

분단이 고착되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단선)가 명백해진 1948년 1월에도 이승만 등 일부를 제외한 김구, 김규식 등 대부분의 정파와 단체들은 거국적인 단선 반대 대열에 결집한다. 제주에서도 단선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반대 견해를 취한다.

 

흥미로운 건 제주 사람들은 신탁을 지지한 좌파 남로당에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단선을 지지한 우파 이승만에게도 동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탁이 민족 자주성을, 단선이 통일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둘 다 나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이 독자적이고 나름 민족적 자주 의식이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국적으로 단선 · 단정 반대가 고조되던 1948년 2월 초, 제주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전단 살포와 시위가 있었고, 이 때문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대규모 검거를 몰고 왔다는 이때의 시위라는 게 일부 경찰지서 앞에서 기세를 올리는 수준이었고, 이 때문에 지서에서는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었다. 제주 사람들은 ‘맨주먹’이나 진배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장하고 총격을 가한 쪽은 경찰이었고, 대부분은 발포 소리에 놀라서 흩어졌을 뿐이다.

 

제주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격렬한 충돌에는 비할 바도 못 되는 온건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빌미로 죄가 있건 없건 청년들은 경찰과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인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에 끌려가서 구타당하기 일쑤였고, 3일 동안의 짧은 기간에 체포된 사람만도 290명에 이른다. 마을에 머물 수 없던 청년들이 입산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4·3으로부터 불과 50일 전의 일들이다.

 

이런 사태에도 4·3 발발 직전까지 제주 사람들의 단선 · 단정 반대 민심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취했다. 4·3 발발 뒤에 「독립신보」가 이를 가리켜 “단선 · 단정에 대한 죽음의 항거”라 쓰고,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이 “생사를 초월한 불타는 조국애”,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이라고 평가한 것은 조국의 미래에 대한 제주 민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웅변적으로 대변하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불의와 학정의 끝

 

1947년 3월 1일은 4·3의 기점이기도 한 제주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는 날이다. 전국적으로 감격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자 했던 3·1절 기념식, 그러나 제주시 관덕정에서는 미군정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열흘 뒤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과 대량 검거로 이어진다. 제주시에서 개최된 3·1절 시위는 현수막을 들고 스크럼을 짰을 뿐 아주 평화로웠다. 따라서 제주 관공서 총파업 결의문에 담긴 분노도 미군정이 아닌 ‘포악한 경관’을 향하는 것이었고, 이런 생각에는 미군정도 동감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국은 민심 수습이 아닌 강공책을 강화하는 치명적 과오를 저지른다. 제주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며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는 서청 제주위원장, “자기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극우파’ 도지사 유해진, 조병옥의 지시로 대거 제주로 향한 응원 경찰과 서청, 결국 제주는 1947년 3·1절 시위 이후 불과 몇 손가락도 안 되는 권력 기관의 수뇌부에 쫓겨 사지로 내몰리기 시작했던 셈이다.

 

숱한 증언에 등장하는 경찰과 서청의 재산 탈취와 부녀자 겁탈, 폭행과 구속, 고문, 테러, 총격 등은 상상조차 못 하던 끔찍한 사태였다.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의 “정의가 없는 왕국이란 대규모 강도 떼”라는 지적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4·3 직전까지 발생했던 제주 사람들의 항의는 지난날처럼 이런 불의와 학정에 저항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도대체 ‘혁명적 폭동’으로까지 호도되었던 이 봉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350명의 대원과 30정의 총, 이것이 4월 3일 24개 경찰지서 중 12곳을 일제히 공격한 무장 규모였다. 어느 특파원의 보고처럼, “빈약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혁명적 폭동’이었다면, 건곤일척의 총공세였을 터였다. 그러나 그날 경찰 희생자는 ‘사망 4명, 부상 6명’이 전부다. 게다가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의 ‘공포탄 한 발로 상황 끝’이었을 정도였다.

 

더 엄밀히 지적한다면, 그 많은 시위와 충돌이 발생한 3·1사건부터 4·3 직전인 13개월 동안, 경찰과 서청의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이 기간에 이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방패 삼아 온갖 누명을 덧씌우며 악행을 일삼았다. 그렇게 ‘악질’로 매도해 마지않던 제주 사람으로 말미암은 사망자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꾸로 그 기간에 제주 사람 최소 10명 이상이 사망하고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달한 건 또한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4·3 직전 미 정보 보고서가 “제주도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라 쓰고, 4·3 봉기 관계자의 “애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미군에게는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는 증언은 그 대답이 아닐 수 없다.

 

 

4·3의 현대사적 의미

 

단선과 단정에 반대하고 불의와 탄압에 저항한 것, 이것이 ‘4·3은 항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런 4·3의 진실 속에는 이 시대에 던지는 몇 가지 메시지가 있다.

 

하나는 부정과 폭력에 맞서는 ‘정의로운 저항’이다. 3·1사건 이후, 제주 사람들은 희생자를 기리며 유가족을 돕고자 자발적으로 모금에 나섰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총파업에는 공무원과 경찰까지 참여하는 제주 공동체 전체의 저항 결기를 보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대량 검거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대에도 ‘나쁜 일’ 앞에 침묵하지 않는 정의로운 저항이 절실하다면, 그건 70년 전 제주 사람이 보여 준 모습이다.

 

또 하나는 단선과 단정에 맞섰던 ‘조국 통일에의 지향’이다. 해방 정국에서 거대한 공감대를 이뤘던 이 슬로건은 제주 사람도 동감하는 가치였다. 전도에서 발생한 각종 시위와 전단 살포는 비상 경계령 앞에서도 식지 않았다. 이젠 누구나 외치는 남북통일이란 민족적 과업이 일찍이 제주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주장으로 울려 퍼졌다. 이 시대에 중단할 수 없는 통일의 울림이 절박하다면, 그 또한 70년 전 제주 사회에 각인되었던 외침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응했다는 메시지다. 제주 사람들은 테러, 고문, 총격 등 심각한 죽음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숱한 시위와 충돌에도 대부분은 맨주먹이었다. 전단을 살포하는 비폭력적 저항이 있었고, 손에는 들 수 있는 모든 걸 들었으나, 치명적 살상 무기인 총포는 없었다. 4·3 전날까지 경찰과 서청의 사망자가 전혀 없었던 이유이다. ‘4·3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킨 의미에서 제주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것도 돌이켜보면 70년 전 제주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원풍경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민심을 헤아리는 정권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이다. 4·3 잔혹사가 몇 손가락도 안 되는 무리의 오도된 인식과 정치적 이익 때문이라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민심을 올곧게 수용하는 선량한 충복이 없었던 건 이 비극의 원점이기도 하다. 민심의 소재를 정확하게 헤아리는 건 오로지 민심에 기초한 정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정권은 민주주의적 가치의 거대한 사회적 공유가 전제될 때 가능한 일이다. 두고두고 이런 가치가 소중한 이유는 70년 전 제주에서 발생했던 비극이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이규배 사무엘 - 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 제주국제대학교 일어일본학과 교수.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일본 정치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주4·3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이규배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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