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행복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932

[행복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예수께서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고 하신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가난한 사람은 그의 희망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자다.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하고 스스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하느님께 의존된 존재로서 자신의 한계성과 유한성을 깊이 인식한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참 모습을 알게 될 때 진정 겸손한 자, 작은 자, 빈자 곧 가난한 자가 된다. 겸손만이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이며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손에 온전히 내맡기는 자다. 그는 어떤 삶의 변화, 역경, 모순 앞에서도 결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 그분의 나라를 확고히 믿으며 마음의 문을 연다. 그의 최우선적인 부는 예수요 복음에 담긴 가치들이다.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마음의 해방, 사람과 사물로부터 초연함을 의미한다. 이 가난의 목표는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가난은 해방한다. 가난은 사람을 사랑의 손길로 이끈다. 그리스도교적 자세로서 가난은 확신에 찬 사랑으로써 고양되며 또 그 사랑의 조건이 된다”(S. Galilea). 마음의 가난은 내적 포기를 가능하게 한다. 포기는 포기한 것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희망하는데서 비롯될 때 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곧 자유와 사랑을 깊게 하기 때문에 해방을 느끼게 하여 인간답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가난에서 중요한 것은 포기 그 자체가 아니라 포기의 동기이다. 마음의 가난은 필연적으로 물질적인 가난과 구체적인 형태의 초연함, 검소한 생활양식으로 표현된다. 실질적인 가난이 따르지 않는 마음의 가난은 공허한 환상일 뿐이다.

 

마음의 가난과 내적 포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요건이다. 마음의 가난이 지향하는 물질적 가난은 순전히 상대적이다. 외적으로 가난한 생활양식은 바로 내적 가난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데 방해될 만한 모든 것들, 즉 물건, 사람, 상황, 계획을 포기해야 내적 가난,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예수가 칭송한 ‘가난한 사람’은 외적 가난을 통해 내적 가난 또는 마음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은 인간의 깊은 변화와 근본적인 정화를 내포한다. 이는 이 세상의 유한한 것에 매어 사는 부자유한 삶을 내적 자유로 인도한다.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초월적이고 무한한 것을 향해 닫힌 마음을 열게 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외적으로 소유하고 있든 않든 간에 진리 안에서 가난한 자이다. 참된 부는 내적 자유를 전제한다. 우리가 버려야 할 집착의 대상은 많다. 무엇보다 버려야 할 것은 염려, 걱정하는 마음이다. 집착, 애착을 벗어나 초탈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자신의 무능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 사랑에 내어맡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삶의 자세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동양사상의 무(無)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닌 텅 빈 충만 또는 충만히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불가의 수행에서 ‘무’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집착하지 않음을 뜻한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영혼은 내적 자유를 얻는다. 비움, 무, 포기 같은 가난의 수행은 힘들고 어렵다.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철저한 고독과 갈등, 훈련을 수반하는 길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화해와 일치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화와 일치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한량없는 부요함에 참여시킨다.

 

구체적인 생활방식인 가난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가난은 하느님의 개별적인 은총이며 부르심으로써 사람 혹은 환경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각자의 교육, 특정한 문화와 사회, 사회적 위치, 직업, 육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에 따라 변화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삶의 기준을 결코 하나의 형식으로 함축시켜서는 안 된다. 새로운 상황에 접할 때마다, 비록 동일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매번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의 가난은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빵을 나누며 기쁨과 슬픔까지 나누는, 다시 말해 물질만이 아니라 형제들의 무능, 약함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마태 19,21) 당신을 따르라 하신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부단한 쇄신과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동기나 역사적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예컨대 중세의 가난의 동기와 형태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시대 교회 안에서 가난의 증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삶의 방식이 지금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복음적 가난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의식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난의 행복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곧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목적이든 정치적이든, 혹은 문화적 투신이든 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투신은 참된 행복을 현실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오직 돈과 물질적인 결핍 또는 물질적인 것과 돈으로부터 이탈을 통해서만 표현되지 않는다. 특전을 벗어던지는 이탈, 비난을 감수하는 이탈, 갖가지 형태의 권력을 외면하는 이탈, 경력을 갖고자 하는 욕구를 배제하는 이탈, 위험과 불안과 박해, 모욕을 감수하는 이탈을 통해서도 가난과 내적 자유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모든 가치들에 마음을 두고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하느님 손에 내맡긴다.

 

‘참된 행복’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완전히 실현되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표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30). 이 말씀에는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한 예수를 본받는 이들에게 주는 행복의 약속이 담겨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고 하늘나라의 보화를 함께 나눈다(마태 11,25 참조).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봄호(Vol. 37), 정하돈 안나 마리아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1,897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