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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아우슈비츠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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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1338

[신앙과 정치] 아우슈비츠는 어디에나 있다

 

 

어떤 동영상을 보았다. 흐릿한 텔레비전 화면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떨어뜨린 어떤 사람, 그의 뒤로는 햇살에 비친 철창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드리워졌다. 마치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엄숙했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영상의 주인공은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절멸과 무자비 앞에서

 

교황의 아우슈비츠 방문은 지난 7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의 열기와 환호의 뒷면에서 두드러지는, 침울하지만 의미 있는 행보였다. 역대 세 번째 교황 방문이었다.

다.

 

아우슈비츠는 무자비의 상징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독일어로 굳이 풀자면 ‘절멸소’이다. 대량학살의 수용소에 맞갖은 무시무시한 말이다. 이 절멸의 장소에서 유다인만 약 6백만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유다인의 3분 2가량에 해당하는 숫자다.

 

한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증오와 광기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이 나치의 유다인 집단학살을, ‘전체(holos)’를 ‘태워버린다(kaustos)’는 의미로 ‘홀로코스트(Holocaust)’라 부른다.

 

침묵 속에 수용소를 돌아본 교황은 당시의 생존자들과 잠시 인사를 나눈 것 외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75년 전 한 가정의 가장을 대신해 죽음을 선택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독약주사로 처형된 방에서 교황은 홀로 기도를 올렸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장면이 바로 이 모습이다. 교황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돌아보고 성찰하였다. 이를 지켜본 언론은 침묵을 통해 고통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었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침묵은 홀로코스트의 어떤 특별한 상징성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이미 아르헨티나에서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체험했다.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공포정치를 감행했고, 이때 벌어진 납치와 고문, 학살로 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관구장, 신학대학 학장으로 있었다. 이때 예수회 동료 신부의 납치에 침묵했다거나, 심지어 독재정권에 협조했다는 오해까지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 「베르골료 리스트」가 발간되어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박해받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도왔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야만의 시대, 정치신학으로 답하다

 

세계전쟁과 군부독재 정권의 20세기는 분명 끔찍한 인간성의 종말까지 밀고 간 학살의 시대였다.

 

인간으로서 더는 상상할 수 없는 재앙, 그 어느 것으로도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했다. 살아서 지옥에 간다면 그 지옥이 바로 아우슈비츠였다.

 

이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 앞에서 신학자들은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은 가능한가?’ 하고 묻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다. 개신교의 유르겐 몰트만과 가톨릭의 요한 밥티스트 메츠가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현대신학, 엄밀히 말해 새로운 정치신학의 출발점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버린 그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아우슈비츠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의 처형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난당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신학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만남과 대화를 가능케 했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의 눈으로, 주변부의 시각으로 신학을 하는 지평을 열어주었다. 유다계 미국의 소설가 엘리 위젤은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다인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고 지적했다. 이렇듯이, 새로운 정치신학을 제시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적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돌아보고 근본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아우슈비츠는 그렇게 현대신학의 ‘종말이자 전환점’(메츠)이 되었다.

 

증오와 광기의 공간 아우슈비츠는 그리스 철학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 절대적 신관에서 벗어나 성서적 · 인격적 하느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했다. 하느님의 고통을 인정할 수 없는 권위주의 신학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신다는 공감의 신학, 다시 말해 하느님의 고난 자체가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통찰을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의 낮은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하려 했다. 세상의 아픔을 확인하고 출발하는 새로운 신앙이자 새로운 삶이다. 마치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전혀 다른 차원의 하느님을 고백했듯이 말이다(요한 20,29 참조). 이러한 신학적 전환은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운동과 결합하여 해방신학이라는 큰 틀을 이루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 연장선에 있다 하겠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 중에 희망을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면, 아우슈비츠도 하느님 상실의 체험 중에 그분께서 함께계심을 확인하는 바탕이다. 세계청년대회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우슈비츠 방문은 세상을 향해 던지는 강력한 신호처럼 보인다.

 

세계청년대회 직전의 상황을 보자. 프랑스 니스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적 테러,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IS(이슬람국가)를 추종한 청년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86세의 자크 아멜 신부 사건 등으로 공포와 경악, 분노와 증오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던 때였다. 종교갈등이 고조되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면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수차례 관용과 포용을 언급했고, 세계청년대회 전야기도에서도 “남을 배척하는 벽과 전쟁 대신 환대와 사랑의 다리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교황의 침묵은 마치 거룩한 전례행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의 시간은 방관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반유다주의와 종교적 광신주의에 강한 저항의 선언으로 보였다.

 

교황은 이날 방명록에 “주님, 주님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이 끔찍한 무자비를 용서하소서.”라고 적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성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용서, 자비, 정의를 말한다. 이 세 단어는 근본적으로 공감과 환대의 영성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도 난민이고, 여기가 수용소일 수 있다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유럽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환대를 언급하는 교황은 확실히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난민은 어느 날 내가 될 수도 있다. 난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추방된 사람들이다. 불안한 내일 앞에서 난민의 처지와 수용소에 감금된 이들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을 다른 누구가 독점한다면, 그 사회는 난민을 양산한다. 1% 인간에게 독점이 용인되는 사회는 그래서 위험하다. 1%와 99%로 나누어진 불평등 사회는 사람들을 ‘목록화’한다. 학벌, 스펙 등의 목록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다가 어느 날 난민의 처지가 된다.

 

난민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자리에서 자꾸 밀려나면 주변부가 어느 날 수용소가 될 수 있다. 민중을 개와 돼지로 여기는 공직자들이 있는 한 나치의 절멸의 수용소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위험과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신앙의 정치화를 위험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불온하고 불의한 정치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은 ‘사람’에게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불문율과 같은 안식일 전통보다 사람을 더 우선하셨다. 복음화의 다른 말은 인간화이다.

 

한편 오늘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가 그리 기쁘지 않다면 민중의 절박한 삶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위태로운 사람들의 현실로 다가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교회의 연민과 연대에 정의가 빠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봐야 할 일이다.

 

난민의 아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언제나 사람을 향하셨고 한결같으셨다. 또 바리사이들의 정의 없는 연민은 언제나 단편적이고 일시적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침묵을 묵상해본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9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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