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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뿌리: 메리 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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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5 ㅣ No.565

[영성의 뿌리] 메리 워드


교회 내 여권 신장 위해 노력



메리 워드는 여성들에게도 교회 안에서 합당한 지위를 갖고 교회를 위해 일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선구자였다.

1585년 1월 23일 영국 요크셔의 부유한 가톨릭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헨리 8세 이후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1606년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조국과 가족을 떠나 스페인령 네덜란드 지역에 있는 관상 수녀원,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러나 그는 차츰 자신의 소명이 관상 생활에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봉사 활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여성은 철저한 봉쇄와 관상을 통해서만 수도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메리 워드는 자기를 신뢰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1609년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새로운 여성 공동체는 소녀들을 교육하고, 영성지도 및 자선 활동을 통해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했다. 이들은 가장 먼저 영국의 가톨릭 박해를 피해 유럽대륙으로 건너온 영국인 가정의 소녀들을 위한 무료 학교를 열었다.

메리 워드는 여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깨닫도록 돕고 싶었고, 사회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몫이 매우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고자했다. 그는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겼다.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취지로 활동을 시작한 이 공동체는 예수회처럼 이냐시오의 영성을 수용해 자신들의 수도 영성에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메리 워드가 자신의 소명으로 알아들었던 세상 안에서의 활동은 당시 교회의 여성 수도생활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지 않았다.

공동체는 여러 장애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고, 1631년에는 교황청에 의해 수도회가 해체되고, 메리 워드가 이단 혐의로 수도원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메리 워드는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로 교회의 몰이해와 오해로 비롯된 고난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고통 중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기쁨을 지닌 채 흔들림 없이 교회에 충실했다. 그는 1645년 1월 30일 선종했다.

메리 워드의 뜻을 이어 교육 사목에 투신해오고 있는 ‘예수수도회’는 한국진출 후 1966년 대전 성모초등학교, 성모여자중학교, 1969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 주력했다. 또한 1967년 충북 보은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수도회 소속 보은성모유치원과 더불어 본당에서 요청하는 유치원교육과 익산 성모병원을 개원해 나환우들에게 도움을 주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현재 교육, 영성, 선교, 의료, 해외선교, 사회복지, 특수사목 등 다양한 사도직에 투신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9월 27일, 김
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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