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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욥기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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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26 ㅣ No.1499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욥기 (3-4) : 욥기의 구조 (1-2)

 

 

삼단계 구성 … 이중적 구도, 전혀 다른 모습의 욥 제시

 

작은 수녀로 있을 때는 큰 수녀님에게 꼿꼿이 말대답하는 동료가 제일 부럽더니, 언니 수녀가 된 지금은 작은 수녀 눈물 쏙 빠지게 야단치는 동료가 제일 부럽다. 뭐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다보니, 주위에는 늘 부럽고 존경스런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나의 「불완전함」이 나에게는 「완전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저 나다운게 가장 완벽한 것이니까. 세기의 명작 밀로의 비너스는 두 팔이 없는 모습으로 되어있지만 그 어느 작품보다 완벽한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두 팔의 부재야말로 그 작품을 완벽함으로 이끄는 비밀인 셈이다. 인생의 부조리와 불완전성, 부재는 욥기에서 계속적으로 질문되고 있는 주제이다. 누구보다 가장 「완전한」 삶(신앙, 도덕, 윤리적으로)을 살았던 그였지만, 그것이 결코 「완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욥은 고통과 질병, 몰이해와 소외라는 「불완전」한 상황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 과정을 진행시키는 욥기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대조적 묘사

 

일반적인 문학 작품들처럼, 전체적으로 욥기는 삼 단계 구성을 적용하고 있다 : 서론(1~2장) → 본론(연사 ; 3장~42, 6) → 결론(42, 7~17).

 

그런데 특이하게도 위에서 제시된 세 부분은 「이중적 대비」라는 구도로 편성되어 있다. 즉 1) 서론과 결론 부분(1~2장 / 42, 7~17)이 「산문」(이야기체, narrative)으로 되어있고, 2) 중심 부분(3장~42, 6)은 「운문」(poetic)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문체적 구분(산문/운문)은 서로 상반된 욥에 대한 이미지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1) 산문체 부분(서론과 결론)은 욥을 매우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2) 운문체 부분(본론)에서는 하느님을 거침없이 비난하고 저항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조적 묘사 때문에 학자들은, 전혀 다른 모습의 욥을 제시하는 별개의 자료층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고, 각기 다른 전승들이 후대에 융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입장들을 정리하여보면 다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1) 설화체(즉 산문부분 : 고난 중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는 욥)에 대한 민담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여기에 후대의 문학적 주제와 문체(운문 부분 : 극심한 고난으로 저항하는 욥)가 첨가되었다는 입장,

 

2) 또 다른 견해는 운문으로 표현된 부분(즉,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저항하는 욥)이 욥기의 본래적 부분이고, 산문체의 서론과 결론은 후대 편집자가 서론(prologue)과 결론(epilogue)으로 제시한 첨가 부분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1)번 가설은, 운문 부분이 제시한 욥의 모습이 산문 부분 욥에 대한 일종의 개정판(revision)이라 이해한 입장이고, 2)번 가설은 운문 부분에 등장하는 욥의 부정적 모습을 전통적인 시각에 맞추어 수정(modification)하였다고 보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학계는 1)번 가설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즉, 운문 부분은 신명기 사가들의 논지에 대한 「지혜문학적 개정」(revision)이라는 것으로, 유다 사회의 전통적 사고 방식이었던 신명기적 사고방식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욥기의 저자는 운문 부분의 첨가를 통해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욥기의 신학적 주제를 다룰 때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불완전함의 미덕

 

「팔푼주의」(八分主義)라는 말이 있다. 과욕을 자제하고 조금 모자란 듯이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세라는 입장이다. 「불완전함」의 미덕을 너무도 잘 제시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 배가 조금 고픈 것을 못 참고 기어이 냉장고를 뒤져 바닥까지 긁어먹은 아이스크림이 생각난다. 위를 좀 비워두었다면 편안한 밤을 보냈을 텐데, 늘 채워서 고생을 하는 셈이다. 결국 어제도, 이젠 습관처럼 되어버린 결심, 「내일 밤엔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지」를 반복하며 잠이 들었다. 근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오늘밤이 왠지 불안하다. 미리 먹어치워서 냉장고를 비워두어야겠다. [가톨릭신문, 2003년 10월 1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을 ‘엘’ ‘엘로아’로 호칭

 

지난주 필자는 욥기 전체의 구성을 소개하면서, 이 책이 크게 운문부분과 시문부분으로 구성되었음을 언급하였다. 이번 주에는 특별히 이 운문 부분의 구성에 주목해보고자 하는데, 다른 성서에 비해 비교적 분량이 많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운문 부분이며, 또한 복잡해 보이는 진행 안에 매우 발전된 체계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운문(본론 부분)의 구성

 

운문 부분은 크게 「전반부:욥과 친구들의 논쟁」과 「후반부:하느님의 등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욥과 친구들의 논쟁(3, 1~37, 24)

 

이 부분은 본론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되며 상당히 긴 분량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은 다시 ① 「세 친구와의 논쟁」과 마지막 친구로 등장하는 ② 「엘리후의 연설」로 구분된다.

 

① 세 친구들과 욥의 논쟁(3, 1~31, 40)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아래에서 제시된 순서를 따라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야훼」라는 이름이 이 긴 논쟁에서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대신 하느님은 엘, 엘로아, 샤다이(전능하신 분)등으로 호칭되고 있다. 아무튼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은 아래와 같은 구도로 반복되고있다.

 

첫째 대화:욥(3장)-엘리바즈(4~5장)-욥(6~7)-빌닷(8)-욥(9~10)- 소바르(11).

둘째 대화: 욥(12~14장)-엘리바즈(15장)-욥(16~17)-빌닷(18)-욥(19)~소바르(20).

셋째 대화:욥(21장)-엘리바즈(22장)-욥(23~24)-빌닷(25)-욥(26~27).

 

이 구도가 보여주는 특이한 점은 세 번째 대화에서 소바르의 연설이 생략되어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생략이 원문 자체의 훼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꿈란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11 QtgJob)에도 소바르의 연설은 생략되어있다. 필사와 해석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훼손된 본문이 고착되어 전수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세 친구들과의 대화 다음에 등장하는 28장(지혜 찬가)은 후대 첨가된 부분으로 추정되는데, 대화부분(3~27장)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선언한 욥과 하느님께 최후 도전을 시도하게 되는 29~31장 사이를 연결시키는 교량역할을 하기 위해 첨가되었다고 보고있다.

 

29~31장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 이전에 욥이 발설하는 마지막 독백 부분으로, 여전히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고자하는 그의 최종적인 입장이 제시되어 있다.

 

② 엘리후의 연설(32, 1~37, 24) 부분은 욥의 독백에 대한, 마지막 친구의 연설이다. 역시 후대 첨가 부분으로 추정되는데, 엘리후라는 인물은 이 부분에 갑자기 등장하였고, 연설이후 이내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욥기의 다른 부분과 연속성을 가진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2) 하느님의 등장(38, 1~42, 6)

 

운문부분의 후반부에서는 하느님께서 드디어 등장하신다. 하느님을 만나기를 그토록 열망하던 욥에게 이제 직접 나타나심으로써 이 긴 갈등의 과정을 해결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매우 체계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하느님의 연사와 욥의 응답이 서로 교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38, 1~40, 2)->욥(40, 3~5)->하느님(40, 6~41, 26)->욥(42, 1~6).

 

 

고통, 말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욥기의 저자는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욥을 극도의 방황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그의 친구들은 고통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구구절절 논함으로써 욥의 고통을 해결하려 하지만,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그 어떤 해결점도 발견하지 못한다. 친구들의 복잡한 담론들은 오히려, 이 고통이 웬만해서는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만을 고조시킬 뿐이었다. 사실, 친구들이 자신들의 좁은 소견으로 고통과 삶을 논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고통과 삶을 아직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오류일 수 있다. 고통이나 삶은 논쟁이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내고 극복해야할 현실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여러 지면을 통해 「감히」 고통과 삶을 논하고 그 전망을 제시해왔다. 아직 내가 고통과 삶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이 글을 쓰는 내내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10월 1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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