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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다블뤼 주교가 잡힌 ‘거더리’의 현재 위치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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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7 ㅣ No.653

다블뤼 주교가 잡힌 ‘거더리’의 현재 위치에 관한 고찰

 

 

1. 서론 

2. 19세기 내포지역의 천주교
3. ‘거더리’의 지리적 고찰
4. 증언의 분석
5. 오해과정의 추정
6. 결론



1. 서론

‘거더리’라는 지명은 한국 천주교회사 특히 박해기 순교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다. 내포지역 삽교천변의 논 한가운데 위치한 거더리는 1850년대 이르러 이웃한 신리(현 합덕읍 신리), 세거리(현 합덕읍 대합덕리), 소덜(현 합덕읍 점원리) 등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모습을 드러낸 교우촌이다.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숨어 지내다 붙잡힌 곳이며 손치호, 손치양, 손자여 등 수많은 순교자들이 살았던 교우촌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장소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거더리’의 위치는 현재의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기록되어 왔다.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서 발간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하(1980년 초판발행)의 역주에 ‘거더리’를 지금의 ‘忠南禮山郡古德面上宮里’로 표기한 이후 《한국가톨릭대사전》1)을 비롯한 거의 모든 책, 논문, 글들에 거더리의 현재 위치는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고정되어 왔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가 숨어 지내다 붙잡히신 곳은 고덕면 상궁리가 아니라 현재의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번지의 9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손치호 회장 집으로 추정되는 집이 그 곳에 그대로 현존하고 있어 정확한 위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최근 발간된 예산군 《고덕면지》2)에는 “다블뤼 주교는 위엥 신부3)와 오메르트 신부 등과 거더리(고덕면 상궁리) 공소에 모여”라고 적고 있어 지리적으로 1㎞ 이상 떨어진 현재의 고덕면 양촌(상궁리) 공소4)가 거더리 공소로 둔갑하기까지 하고 있어 혼란을 더욱 야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거더리’의 정확한 현재위치를 찾고, 잘못 기록된 각종 문헌상의 주소(위치)를 정정할 필요가 있으며, 이 작업은 당시에 대하여 전래되어 오는 증언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지금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본고는 각종 문헌에 언급되는 ‘거더리’의 지명에 대한 문헌적 고찰과 현장조사, 주변의 지리적 고찰, 그리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거더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어떻게 하여 이런 착오가 생겼는지에 대해 추찰하고자 한다.


2. 19세기 내포지역의 천주교

내포지방은 한국 천주교 3대 요람지의 하나인데 이곳은 산간오지가 아니라 기름진 평야를배경으로 하고, 良人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이곳이 천주교의 요람지가 된 요인은 다음과 같다.5)

첫째, 자연적 요인 : 이 지역은 아산만으로부터 태안반도의 安興梁을 돌아 금강하류에 이르기까지 삼면이 둘러싸인 지역이며, 동쪽은 차령산맥의 500~600m의 연봉이 남북으로 가로놓여 금강유역과 경계를 이루고, 중앙부는 가야산맥의 400~600m의 연봉이 내포지방의 동서를 갈라놓고 있다. 신리가 있는 동쪽은 내포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삽교천 등 感潮河川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여 상업의 요지로도 중요시 되었다.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시행되기 전인 조선후기까지 犯斤內浦 또는 由宮浦라 칭했던 삽교천 하류는 하천이라기보다는 만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었다. 만조시에는 조수가 내륙 깊숙이 밀려들고 간조시에는 하천 양안에 넓은 간석지가 노출되었다. 각종 염생식물이 무성한 군락을 이루고, 수운이 편리하였다.

반면 행정중심은 차령산맥의 동쪽 공주를 중심으로 한 유림의 본거지였다. 그리하여 내포지방은 조선 후기 관리의 좌천지 또는 유배지 취급을 당해 상대적으로 양반세력이 약했으며, 농상어업에 종사한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득이 되었고, 천주교의 전파에도 유리하였다. 황해로 돌출하였기 때문에 서해안을 따라 서울로 오는 선박들의 경유지가 되었고 異洋船들의 방문이 잦았다. 큰 조석간만의 차와 암초, 급류 등으로 위험하였지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편리한 수로이용을 제공하였다. 수륙교통의 요지였던 이 지역은 성직자와 신자들의 비상 탈주로의 확보가 쉬워 선교대상지로 적합하였다. 특히 신리 부근은 행정구역의 경계에 위치하여 역시 피신이 더욱 쉬웠던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지방은 겨울철에 한랭하고, 강한 서북풍이 탁월하고 눈보라가 심하며, 수로변에 갈대숲이 울창하여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왜냐하면 수산업이나 해로를 통한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어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종교적 행사가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심리적 요인 : 내포지방은 고려 말의 倭寇, 조선후기의 異洋船 출몰, 청일전쟁 등의 전란과 해일 등 자연재해를 자주 입었던 곳이다. 이와 같은 사건과 재해는 이 지방 주민의 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내포지방은 해일의 피해가 큰 지역이다. 해안은 물론 삽교천, 곡교천 등 모든 감조하천까지 해일로 인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자주 입었다.

내포지방은 생활자원이 비교적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왜적의 침입과 잦은 재해로 인해 지역 주민의 생활은 결코 여유롭지 못하였고 일찍이 이상향을 추구하였다.

셋째, 정치 · 사회적 요인 : 천주교는 유일신인 천주를 창조자이며 만인의 아버지로 여기며 내세관을 중요시하고, 전통적인 禮敎의 질서를 부정하였다. 또한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동시에 남녀평등 사상을 주입시켰다. 이러한 것은 조선사회의 전교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포지방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는데 그것은 타 지역에 비해 유림의 세력이 강하지 못했으며, 평야부에 거주한 평민층의 뛰어난 기동성과 진취적인 기상 때문이었다. 


사대부층이 평야 주변부에 분산 · 거주한 것과 대조적으로 농 ·  · 천민은 평야부에 많이 거주해 왔다. 내포평야의 상당부분은 천변의 저습지 개간을 통해 조성된 간척지인데 16세기 중엽부터 조선 말까지 꾸준히 증가해왔다. 이러한 야촌을 사대부들은 기피하였으며 반면 평민들은 활기찬 농업과 교역의 기지로 만들었다. 또한 기동력과 진취성을 발휘하여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새로운 정보와 사상을 수용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넷째, 인적 구성 요인 : 천주교는 아시아 지역에서 엘리트 집단을 선교대상으로 삼으면서 토착문화에 적응하는 양면적 전략을 구사하였다. 匠人 · 船夫 · 漁民 등 良人으로 구성된 내포지방은 지배층 공략을 목표로 삼았던 천주교의 전략목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오히려 이 지방에서 양인 중심의 신앙공동체를 조직하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내포지방의 초기 신앙공동체는 평야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교우촌인 ‘신자공동체형’과 ‘신자와 비신자들의 혼거형’이었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면서 점차 산간지대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산간지대의 신자공동체형’과 ‘평야지대의 혼거형’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 1850년대까지 평온한 시기가 계속되면서 다시 평야지대에도 ‘신자 공동체형’의 교우촌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6) 그 대표적인 예가 홍주 거더리와 신리(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합덕의 세거리(현 합덕읍 대합덕리 3호) 등이다.


3. ‘거더리’의 지리적 고찰

1) 조선시대의 행정조직과 문헌상의 ‘거더리’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지방행정구역의 기본단위가 縣이었다. 대개 산과 물이라는 자연지리적인 경계에 따라 생활환경의 동질성 여부가 결정되므로 현의 단위도 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 건국을 거치면서 지방 세력의 견제와 효율적인 중앙 집권력의 발휘라는 정치적 목적과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군사적인 목적 때문에 때로는 인위적인 분할과 폐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자연지리적인 조건과 정치, 군사 등 역사적 조건이 결합되어 牧 · 府 · 郡 · 縣의 다양한 지방행정단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경국대전(1469)에 의하면 전국이 8도 16목 52부 68군 159현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알 수 있는데7) 고덕면은 159현의 하나인 德山縣에 속했다. 충청도는 충주 · 청주 · 공주 · 홍주 등 4목으로 나눠지고 12군 38현이 그 아래 분속되어 있었다.

1914년 군면제도로 개편되면서 예산현 · 대흥현 · 덕산현이 합쳐져서 예산군이 되고 옛날 이산현 일대가 덕산면으로 분할되자 원래 덕산 관아가 있던 고현내면8) 일대는 옛날의 덕산현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의 고덕면으로 이름을 삼게 되었다.

‘거더리’라는 지명은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7번, 《병인치명사적》에 18번, 《박순집 증언록》에 1번, 《병인증언록》에 10번, 《치명일기》9)(1895)에 8번 등 도합 44번 등장한다. 홍주 거더리(25회), 거더리(10회), 내포 거더리(5회), 충청도 거더리(2회), 홍주 거동리(1회), 덕산 거더리(1회)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충청도 · 홍주 · 덕산의 명칭은 당시(1860년대) 이곳이 속했던 행정구역상 충청도 洪州牧 德山縣에서 온 것이고, 내포는 충남의 삽교천 서쪽인 아산만 일대의 10개의 현(아산 · 당진 · 면천 · 홍주 · 덕산 · 해미 · 결성 · 보령 · 서산 · 태안)을 일컫는 지방명에서 온 것으로 모두 동일한 한 곳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거더리’는 행정명칭이 아니고 자연부락의 명칭으로 현지 주민들은 ‘그더리’, ‘거들이’, ‘거더리’ 등으로 불렀다는데 삽교천의 홍수가 나면 모두 물에 잠겨 ‘거덜’난다고 하여 ‘거더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따라서 삽교천변의 여러 작은 부락들도 ‘거더리’로 불려졌다.

문헌상에 나오는 ‘거더리’는 지금의 예산군 고덕면과 당진군 합덕읍의 경계지역, 삽교천 서측 천변의 논 가운데 약 2km에 걸쳐 분포되었던 작은 부락(지도상의 ‘보안’, ‘그더리’, ‘하리’, ‘도촌’) 중의 하나였다. ‘보안’, ‘그더리’는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마을은 ‘下里’와 ‘島村’인데 마을 사람들은 ‘하리’(행정구역상 예산군 고덕면 상궁3리)를 ‘윗거더리’, ‘도촌’(행정구역상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을 ‘아랫거더리’라고 부른다.

2) 현장과 지리적인 고찰

현재 ‘거더리’라 불리는 마을은 150m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마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윗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3리), 다른 하나는 아랫거더리(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이다. 윗거더리는 20여 호로 구성되어 있고, 아랫거더리는 불과 5호이다.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집으로 알려진 현재의 朴씨 집은 아랫거더리인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9이다.

불과 150m 떨어져 있고 같은 자연부락임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다른 행정구역으로 갈라짐으로써 윗거더리만 ‘거더리’로 간주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상 명칭인 고덕면 상궁리가 ‘거더리’의 현 위치로 기재되어 왔고 의심없이 고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행정리로서 상궁리는 윗거더리를 포함해서 궁리 · 건너말 · 양촌 · 닥엽 · 중뜸 · 당재 등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10) 때문에 거더리는 그 가운데 극히 일부지역일 뿐만 아니라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아랫거더리(합덕읍 신리 99)는 실제 존재하고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배제되어 온 것이다.

윗거더리는 조대비의 탄생지인 궁말(궁리라고도 함)의 아래쪽에 있다 하여 위쪽의 上里에 대응하여 下里라 불렀고 아랫거더리는 만조 시 주변이 물에 잠겨 섬과 같다 하여 島村이라고 부른다.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으로 알려진 박기봉 씨 집(당진군 합덕읍 신리 99-9)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곳이 배가 닿는 배터였다(이웃 집의 김명환 증언).

이 곳은 행정구역의 경계인데다 수륙교통이 용이해 박해 시 성직자와 신자들의 비상 탈주로의 확보가 쉬워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4. 증언의 분석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거더리의 손 니콜라오11) 회장 집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고, 기록도 없다. 다만 오기선 신부 일행이 1958년 6월 20일 신리 방문 시 찍은 사진에 다블뤼 주교가 사시던 집의 표시가 나올 뿐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622번 국도변의 新村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진 속의 표시는 신리 공소(현재 신리 성지의 손자선 토마스 생가)의 위치로 보인다.

다블뤼 주교는 1863년 보령 판서골 화재 이후에는 홍주 거더리로 이전하였는데12), 아마도 한 집에 머물기 보다는 몇 군데의 거처를 옮겨 다녔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약탈과 압수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수집한 자료를 분산 보관하였을 것이다. 신리 손자선의 집(현 합덕읍 신리 63-3)과 거더리 손치호 회장 집(현 합덕읍 신리 99-9)은 그 몇 군데 장소 중에 가장 많이 머문 곳이 확실하다.13) 손치호와 손자선은 당숙과 조카 사이로 두 집은 불과 600m 떨어져있기 때문에 비상 시 피신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림 1> 신리와 거더리. 아랫거더리(도촌)는 신리 남쪽 500m 거리에 있으며, 윗거더리(하리)는 아랫거더리의 남서쪽 150m 거리에 있다. 1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상궁3리)와 당진군 합덕읍 신리로 나누어져 있다.

거더리 및 손치호 회장 집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1) 거더리의 지리적 상황

(1) 증언 1(김병국, 1926년 신리 태생, 2007년 3월 26일 증언)

 
<그림2> 거더리 신리 사진(〈사제생활 반생기〉, 《순교자의 얼을 찾아서》, 1966, 678쪽).

“거기는 신리하고 내왕하기가 어려웠어요. 겨울에는 그냥 바다였어요. 우리 어려서부터 거기 컸지만 … 왜 어려운고 하냐면 걷어붙이고 가야하니까. 그때 가만히 생각하니까요. 겨울에는, 여름에도 그렇고 겨울에도 그렇고 그 거더리 가기가 어려웠어요. 겨울에는 물이 그냥 전부 바다였어요. 그러니까 거더리는 뭐 큰 일이 있기 전에는 거더리에는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겨울에는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갈 수도 없고 거기 사람들이나 그냥 어떻게 다녔지 거기 사는 사람 아니면 갈 수가 없었어요. 그 거더리가 얼마나 먼뎁니까. 겨울에는 바다 같은 그런 그 물을 헤치고서 성당에 다니신 거예요. (거더리 신자들이) 합덕성당에 다니시는데, 거기 성당에 가자면 참 그야말로 어디 나들이도 큰 나들이 가듯 해야 가지 그렇지 않으면 못 갔어요.”

2) 손치호 회장 집

(1) 증언 1(김병국, 1926년 신리 태생, 2007년 3월 10일 증언)14)

“본인은 어려서부터 朴 씨가 살고 있는 집이 안 주교님이 포졸들에게 잡혀간 집이라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 현재 이 집은 朴씨 할아버지 때부터 살기 시작하여 3대를 내려오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집은 자그마한 초가집이였었고, 이 집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부엌이 있었습니다 … 거더리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윗거더리이고 하나는 아랫거더리입니다 … 안 주 교님이 잡히신 집은 그 때나 지금이나 신리 거더리입니다. 본래 이 집 주인은 치명자 손치호 니콜라오의 집이라는 것을 그때 우리들은 듣고 다 알고 있었습니다.”

(2) 증언 2(김병국, 1926년 신리 태생, 2007년 3월 26일 증언)15)

“본인은 신리 강개출신으로 3년 전 이곳(일산시 마두동)으로 이사 왔어요. 12호밖에 살지 않았는데 모두 살기 어려웠으며, 합덕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백 필립보 신부가 합덕성당을 지었으며 어릴 때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랫거더리 박기봉 씨 아버지가 당시 회장이었는데 특별한 첨례일은 합덕성당에서 첨례를 드렸지만 일반 주일날에는 그 집 문간채에서 첨례를 보았어요. 한 10명 정도 보았는데 윗거더리에서도 신자가 왔었어요 … 그 집은 기어들어갈 정도로 작은 집이었으며, 밖에서 뒷방 들어가는 데가 있어요. 어떻게 아냐면 같은 신자고, 박기봉이라는 사람이 우리보다 나이를 덜 먹어서 같이 크지는 않았지만 우리와는 가까운 사람이에요. 그 집은 원래 손 회장 집이었다는데 이름은 니콜라온가? 하여튼 베드로나 바오로는 아니고 … 당시 신자들은 안 주교님이 잡히신 집으로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거더리에서 신리 가는 것도 큰일이었어요. 물이 차서 질퍽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윗거더리는 쉽게 오갔습니다 … 아랫거더리요? 그거는 저희들 어려서도 그 때는 주일날이면은 공소집이라고 해서 공소집에 모여서 책 가지고서 참례하고 그랬어요.”

 
<그림 3> 김병국의 자필 증언(2007. 3. 10).

(3) 증언 3(김명환, 1955년 신리 태생, 2007년 3월 11일 증언)

“저는 거들이에 살고 있는 주민 김명환입니다. 이 작은 마을은 도촌이라고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랫거더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2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로는 5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 때 삽교천 제방을 쌓아 간척사업을 하기 전에는 하루 두 번 만조 시 조수가 들어와 바다와 이어졌고 섬처럼 주변이 물에 잠기기 때문에 도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집 바로 앞이 배가 닿는 배터였습니다. 우리집 바로 옆에 사시는 박기봉 씨 집의 문간채는 옛날에 프랑스 신부가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아직 그 집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 초가 3칸인데 오른편 한 칸은 문이고 왼편 두 칸은 방인데 이곳에 프랑스 신부가 살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오른편 칸은 시멘트로 덧붙여 증축하였으며 지붕은 슬레이트로 바꾸었습니다. 안채는 다시 지은 집입니다. 전에는 합덕 본당 신부와 신자들이 와서 행사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또 거들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훨씬 크며 상궁리 3구(윗거더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주교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예산군에 속해 있지만 모두 합덕성당에 다니는 신자들이며 옛날에는 그곳 신자들이 이곳에 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4) 증언 4(박유신, 1950년생 상궁3리 이장 / 지상순, 1939년생, 합덕성당 상리 구역장, 2007년 3월 11일 증언)

“… 상궁리의 합덕-고덕 간 도로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논 한가운데 거더리라고 부르는 약 20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약 150미터 거리를 두고 윗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3리)와 아랫 거더리(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가 있습니다 … 아랫거더리 박 씨(박기봉, 75세) 집에는 약 140년 전 안 주교님이라는 프랑스 신부가 숨어 지내다 포졸에 잡혀갔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엄연히 아랫거더리의 박 씨 집이 있는데 윗거더리(하리라고도 부름)로 잘못 알고 찾아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현재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은 노인들 사이에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천주교 신자들도 줄어들고, 젊은 사람들은 알지도 관심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리구역장이신 지상순님과 함께 증언, 확인합니다.”

(5) 증언 5(송창웅,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양촌 출신, 2007년 3월 26일 증언)

“저는 양촌 출신으로 고조 할아버지(송옥천)께서 1854년 공주에서 치명하셨다 하나 본명을 모르기 때문에 순교 관련 기록에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적, 교회사 관련 등의 문헌 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거더리의 박기봉 씨 아버지와 저의 할아버지는 의형제간이기 때문에 매우 가까웠습니다. 늘 우리 집에 오시고 성당에서 만나고 그랬습니다. 저 어렸을 때예요. 얼마나 가까웠느냐면 서로 한식에도 왔다갔다 할 정도로 가까웠어요. 그리고 그 양반 뒤에는 우리 할아버지 둘째 처남 손석윤 씨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 작은 오빠가 거기 살았어요. 강개에. 그 존함을 제가 잘 모르겠는데요(그분의 성함은 ‘손승태’라고 김병국 씨가 기억). 박 씨 집이 안 주교가 잡히신 집이라는 것을 강개의 작은 할아버지로부터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상 다섯 사람의 증언은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집은 현재 합덕읍 신리 99-9번지인 아랫거더리의 박기봉 씨 집이라는데 거의 일치하고 있다.

현지 조사결과 박씨 집은 3대째 살고 있는데, 문간채 일부만 옛 그대로 일 뿐 문간채와 약 5m의 마당을 두고 안채는 새로 지었으며(벽돌조에 시멘트 기와지붕) 문간채도 우측에 시멘트벽을 증축하여 출입문을 넓혔다. 문간채는 흙벽조이며, 원래 초가였는데 증축 시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올렸다. 두 칸의 방에는 구들을 놓았으며, 문간에 아궁이가 있다. 기둥, 서까래, 흙벽 등의 상태로 보아 200여 년은 되었을 것 같다.


5. 오해의 과정 추정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집이 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잘못 알려졌을까? 1980년 달레의 《韓國天主敎會史》 下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할 때 원저에 나오는 ‘거더리’라는 지명을 ‘지금의 忠南禮山郡古德面上宮里’라고 역주를 달았기 때문이다. ‘거더리’라는 명칭은 행정구역 명칭이 아니고 이 일대의 홍수 시 물에 잠겨 ‘거덜나는’ 논 가운데 몇 개의 작은 마을, ‘보안’, ‘그더리’, ‘하리’, ‘도촌’ 등을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자연부락 명칭이다. 아마 역주를 달 때 다음과 같은 착오가 있지 않았나 추정을 해본다.

 
<그림 4> 거더리의 현재 사진.

① 지도상에 ‘거더리’와 유사한 명칭은 남서쪽 1km 떨어진 삽교천 변에 ‘그더리’가 있고(지금은 없어졌음) 그 마을의 현 위치가 고덕면 상궁리이기 때문에 의심없이 이를 그대로 표기했을 수도 있고,

② 마을 사람들이 ‘거더리’라고 부르는 마을의 대부분이(신리에 속하는 도촌을 제외하고) 고덕면 상궁리에 속하기 때문에 현 위치를 상궁리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③ ‘거더리’라 불리는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 윗거더리(하리라고도 부름)이므로 거더리의 대표적 위치로 표기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윗거더리에는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집이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으며(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음), 주민들은 150m 떨어진 아랫거더리도 같은 거더리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 상기 증언에서 보듯이 아랫거더리에 사는 현 주민과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몇 사람들은 아랫거더리가 안 주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전해 내려오는)을 뚜렷이 확인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소유자인 박기봉 씨는 3대째 살고 있으나 어떻게 해서 할아버지 때부터 손치호 회장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기억)을 못하고 있다.


6. 결론

‘거더리’는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붙잡힌 곳이며 손치호, 손치양, 손자여 등 수많은 순교자들이 살았던 교우촌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장소의 하나이다.

 
<그림 5> 거더리 주변지도 지도상에 보이는 ‘보안’, ‘그더리’, ‘하리’(이상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도촌’(당진군 합덕읍 신리)을 마을 사람들은 모두 ‘거더리’로 불렀다. ‘윗거더리’인 ‘하리’와 ‘아랫거더리’인 ‘도촌’은 불과 150m 떨어져 있다.

그동안 ‘거더리’의 위치는 현재의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기록되어 왔다. 상궁리는 ‘거더리’라 불렀던 작은 마을(윗거더리)을 포함하여 궁리, 건너말, 양촌, 중뜸, 당재 등 5.118㎢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가 잡히신 마을은 상궁리의 ‘윗거더리’가 아닌 합덕읍 신리에 속하는 ‘아랫거더리’이다. 현지에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각종 문헌에는 구별하지 않고 그냥 거더리(현재의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기록되어 옴으로써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윗거더리’와 ‘아랫거더리’는 불과 150m 떨어진 마을로 주민들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었지만 별개의 행정구역(예산군 고덕면 / 당진군 합덕읍)에 속하기 때문에 ‘거더리’의 현재 위치를 ‘고덕면 상궁리’로 표시할 경우 다블뤼 주교님이 잡히신 장소로 추정되는 ‘아랫거더리’가 배제되고 상궁리의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심각한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잘못 기록된 각종 문헌상의 주소(위치)를 정정하는 것은 전래되어 오는 증언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재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문헌적 고찰과 현장조사, 주변의 지리적 고찰, 그리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각종 문헌에 언급되는 ‘거더리’의 현 위치가 ‘아랫거더리’ 또는 ‘도촌’이라 부르는 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번지 일대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 이런 착오가 생겼는지에 대해 추정하여 보았다.

따라서 아랫거더리의 존재를 배제한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의 거더리의 현재 위치 표기는 하루속히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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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3, 1996, 1500쪽.

2) 《古德面誌》, 2006. 12. 고덕면지편찬위원회, 473쪽.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다블뤼 주교는 위앵 신부와 오메르트 신부 등과 거더리(고덕면 상궁리) 공소에 모여 대책을 강구하다가 내포일대의 신자마을로 일단 피신을 한다. 그러나 그 뒤 그들이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66년 3월 23일에 군문효수형을 받고 당시 충청도 수영인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 순교를 하였다.”

3) 위앵(Huin, Martin Luc, 1836~1866)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로서 홍콩 · 상해 · 만주를 거쳐 1865년 5월 27일 내포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 주교로부터 조선어를 배운 후 세거리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방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3월 9일 거더리에 가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와 만났으며, 다블뤼 주교의 자수 권유로 3월 12일 체포되어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하였으며, 1984년 시성되었다. 


4)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는 양촌 공소와 상리 공소 등 두 개의 공소가 있다.

5) 최영준, 〈19세기 내포지방의 천주교 확산〉, 《대한지리학회지》 34-4, 1999.

6) 차기진, 〈내포지역의 복음 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내포 천주교회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천주교 대전교구 솔뫼성지, 2002.

7) 《경국대전》1. 吏典 外官職의 내용을 살펴보면 종2품 관찰사 8명, 종2품 부윤 4명, 정3품 목사 16명, 정3품 대도호부사 4명, 종3품 도호부사 44명, 종4품 군수 68명, 종5품 현령 29명, 종6품 현감 130명이 지방수령의 전부이다(《古德面誌》, 2006, 45쪽).

8) 덕풍현 소재지에 있던 덕산현 소재지가 이산의 병영 옛 성안으로 옮겨가게(1421) 됨으로써 덕산현아가 있던 대천리 일대는 옛날 현안에 있던 면이라 하여 古縣內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9)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명단과 약전을 수록한 책. 諡福수속을 위한 예비조사단계의 자료. ‘묵은 문서’를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각 사람들의 연기와 치명한 시기, 장소가 부정확하다(《한국가톨릭대사전》, 8333쪽).

10) 상궁1, 2, 3리 합하여 5.118㎢의 면적에 228가구 291명이 거주하고 있다(《고덕면지》2006, 369쪽).

11) 성 손자선(토마스)의 당숙으로 1868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2) 차기진, 〈내포지역 복음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성 김대건 신부 생가 및 기념관 건립 기념 세미나, 2002, 118쪽에는 사목중심지를 홍주 거더리로 적고 있으나 사목의 중심은 1850년대 이미 공소가 설정되었고 보다 큰 마을인 500m 거리로 이웃한 신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더리는 불과 몇 호밖에 살지 않은 작은 마을일 뿐만 아니라 사방이 물로 차 있어 나다니기가 매우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13) 다른 곳은 이미 교우촌(공소)의 맥이 끊겼거나 지명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음에 비해 신리는 교우촌의 맥이 이어져오고, 마을 사람들의 구전과 함께 집의 증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리를 주 거처로 삼고, 가깝지만 접근이 쉽지 않은 거더리(아랫거더리)를 은신처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14) 81세에 몸이 다소 불편하나 몇 차례의 면담을 통해 비교적 정리된 문장으로 증언하였다.

15) 증언을 녹취하기 위해 2007년 3월 26일 김성태 신부(신리 주임), 권영옥 수녀, 양촌 출신 송창웅 · 송지연 · 유진구(송지연의 남편), 김정신 교수(단국대)가 김병국이 현재 사는 집(일산시 마두동 건영빌라)을 방문하여 이루어짐.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원저, 안경열 · 최석우 역주, 《韓國天主敎會史》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오기선, 〈사제생활 반기〉, 《순교자의 얼을 찾아서》,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1966.
차기진, 〈내포지역의 복음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성 김대건 신부 생가 및 기념관 건립 기념 세미나》, 2002.
천주교 구합덕 교회, 《구합덕 본당 100년사 자료집》, 1990.
최영준, 〈19세기 내포지방의 천주교 확산〉, 《대한지리학회》 34-4, 1999.
충청남도,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1896-1996》, 충청남도, 1996.
경인문화사, 《한국의 지명사전》, 경인문화사, 1974.
한국교회사연구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 현대문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편, 〈여사울 · 신리 성지순례〉,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2003. 


[교회사 연구 제28집, 2007년 6월, 김정신(단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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