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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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30-31: 시노달리타스의 목표 - 공동 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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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17 ㅣ No.791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30) 시노달리타스의 목표 : 공동 식별 1

 

 

시노드적 생활의 실천은 결국 하느님 백성이 함께 하느님의 뜻을 알고 살아가기 위한 ‘공동 식별’에 지향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여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 때, 그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식별이 필요하고, 이 식별은 특정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은 어느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통해 그 백성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식별은 시노드적인 과정과 그 사건의 핵심에 위치한다. 교회의 시노드적 삶에서 (...) 공동체적 식별은, 하느님께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 안에서 들려주시는 부르심을 발견하게 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113항)

 

세례성사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인 ‘신앙 감각’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전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도록 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공동체의 신앙 감각이 발휘되어 그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각자의 신앙 감각을 발휘하여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을 바로 ‘공동 식별’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의 식별은 단순히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설 자리가 없는 대화와 기도의 공간’이 되어, 궁극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을 ‘함께’ 듣고,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그 사명을 ‘함께’ 수행해 나아가기 위한 다방향성의 상호 호혜적 구조로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즉 ‘나의 주장’만을 펼쳐서 어떤 여론을 조성하거나, 그에 대한 합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더불어 느끼기” (sentire cum ecclesia), 즉 교회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느끼고 체험하며 지각하는 것(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56항)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가 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다양한 은사로 서로에게 봉사하며 함께 걸어가는 친교의 교회를 이루도록 이러한 ‘신앙적 본성’을 선사해 주셨습니다.

 

사실 ‘공동 식별’은 시노드적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하느님 백성 각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소리를 ‘서로 듣는 상호 경청’과,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 전체에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백성이 ‘함께 듣는 공동 경청’으로 이루어집니다. [2024년 1월 14일(나해) 연중 제2주일 춘천주보 4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31) 시노달리타스의 목표 : 공동 식별 2

 

 

공동 식별이 이루어지기 위한 첫 발걸음은 ‘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병폐라 할 수 있는 성직자 중심주의와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많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방적인 소통 구조에 대한 원의만을 그려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노드 과정에서도 단순히 의견이나 건의 사항을 수집하는 차원으로만 생각하고 ‘이것저것 해 주세요, 내 건의 사항은 왜 안 들어주시나요, 역시 교회는 변함이 없네요’와 같은 회의론이 여전합니다. 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부의 큰소리에 의해, 또는 그들이 주장하는 합리성과 효율성의 가치에 의거한 판단에 의해 교회를 마치 정치판과 같은 의회 민주주의의 장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한다면 교회를 ‘일시적으로는 평등해 보이는’ 집단으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 정체성은 상실하고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식별의 근본은 ‘기도’와 ‘말씀에 대한 우선성’입니다. 교회가 함께 찾고 따라야 하는 근본적이고 궁극적 원리는 ‘여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하고,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준거 또한 ‘다수’가 아닌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효과적인 수단을 통하여 의견을 모으고 함께 결정을 하였다 해도, 말씀과 성찬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 공동체는 민주적 공동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하느님 백성의 교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식별’이 결여되었다는 것의 방증이므로, 시노달리타스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결정하는가’가 아니라 ‘함께 식별하고 있는가?’로의 의식의 전환이 필수적입니다. ‘바라보는 시선’의 총체이자 공유인 ‘공동 식별’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의 시선’을 찾아 나가는, 신속, 정확, 효율의 가치보다 오히려 ‘여백과 기다림’의 시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시노드적 교회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세계 주교 시노드의 예비 문서에서도 공동체적 식별을 위해 유념해야 할 태도를 언급하는데, ‘하느님 백성은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문에 응해야 한다는 것’, ‘최대한 광범위하게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질적으로 복음 선포 사명의 실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구의 사목 지침의 근간이 되는 ‘말씀 살기’는 식별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 이 식별은 시노드적 과정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말씀 살기’와 ‘시노드적 교회를 살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공동체는 지금 말씀으로 살아가고, 말씀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2024년 1월 21일(나해)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춘천주보 4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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