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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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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1763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이벽 요한 세례자.

 

 

지난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로,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그들에 관한 자료를 함께 읽어보면서 ‘평신도 희년’을 맞아 역사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갈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 버린 덕조여!

 

신선 같은 학이 세상에 내려왔나

높고 우뚝한 풍채 절로 드러나네.

나부끼는 흰 날개 새하얀 눈 같아서

닭과 오리들이 시샘하며 골부리네.

울음소리 높은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맑고 밝음은 풍진세를 벗어났네.

갈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 버려

허전하고 괴로운 이 내 마음을 슬프게 하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이벽(1754-1786년)의 죽음을 애달파하며 지은 시이다(『여유당전서』 1집). 이벽의 죽음을 애도한 이가 또 있으니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한 사람인 박제가이다. 그는 ‘가슴속에 기형을 크게 품으니 사해에 그대 홀로 조예 깊었네.’라며 이벽이 고대에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인 기형(璣衡), 즉 혼천의의 원리를 잘 알고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지난 해 간행된 시복 자료집에는 지금까지 밝혀진 이벽에 대한 자료가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주요 자료는 『경주이씨 족보』, 황사영 「백서」, 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 자 편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순조실록』, 안정복의 『순암선생문집』과 「부부고」,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박제가의 『정유각집』, 황윤석의 『이재난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재기의 『눌암기략』, 이만채의 『벽위편』이다.

 

『경주이씨 족보』에는 ‘이벽의 자는 덕조(德操)이고 호는 광암(曠庵)이며 갑술(1754)생으로 을사(1785)년에 32세로 죽었다. 『숭례의설』을 지었으며, 두 번 장가를 갔는데 첫 부인은 안동 권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해주 정씨이다. 묘는 화현 해좌에 있는데, 3위 합장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79년 4월 20일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화현리에 있던 이벽의 무덤을 열었을 때 ‘공인 안동 권씨의 묘 / 통덕랑 경주 이벽의 묘 / 공인 해주 정씨의 묘’라고 적힌 지석이 발견되었으며, 이때 이벽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 성지로 이장되었다.

 

이벽이 스스로를 언급한 기록은 자신의 스승인 「정산 이병휴 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벽은 삼가 변변찮은 제물을 갖추어 정산 이 선생 영전 아래 곡하며 고하나이다. 옛날 갑오년에 소자가 바야흐로 남으로 내려가 문하에 인사를 드리고 6~7일을 곁에서 머물렀는데, 스승님은 소자의 나이가 어리고 변변치 않은 것에 관계없이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으셨고, 깊이 있는 만남을 약속하셨습니다. 떠나올 때는 경계하심이 여러 차례였고, 이별한 뒤에는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주셨으니 대개 스승님의 소자 사랑이 얕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자 역시 그 뜻을 받들고, 마음 깊이 감격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제문에서 이벽은 변변치 않은 제자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경계의 말을 당부하고 또 당부했던 스승에 대한 절절함을 드러냈다. 자신은 변변치 않다고 스스로 겸손했으나, 스승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았고 아까워했으며, 시대사조를 거슬러 가는 제자의 앞날을 걱정하고 또 걱정했으리라. 이벽은 이 제문을 쓰고 10년 뒤에 스승을 따라갔다.

 

 

북학파 학자들이 남긴 기록들

 

당대의 지식인들은 과연 이벽을 어떻게 보았을까. 후대의 평가 못지않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가운데 특히 북학파 학자들이 남긴 기록은 이벽의 삶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 눈여겨볼만한 자료이다. ‘요사이 서울 안에 서학과 수리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자로 … 이벽이 있는데 바로 무인 이격의 동생입니다. 그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사람됨이 고결한데, 지금 저동에 살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년)의 이 글은 조선후기 학자 황윤석(1729-1791년)이 지은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총 50권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과 다루어진 주제들의 다양함 때문에 한국 저술사에서도 손꼽힌다.

 

여기에는 또 전설별검 나동선의 평가도 실려있다. 그의 평가는 좀 더 사실적이고 흥미롭다. 황윤석이 나동선에게 “지금 도성 사람들 중에서 또한 총명하고 특별히 뛰어난 선비가 있느냐?”고 묻자, “이벽이란 사람이 있는데 … 어려운 글 열 줄을 한눈으로 내려 보면서 비호같이 해석하며, 눈 하나는 위를 보고 다른 하나로는 아래를 볼 수 있습니다. 체력이 누구보다 뛰어나 한 번에 3회전을 할 수 있으며, 두 길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평소 서양의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하여 한때 그 무리의 으뜸이 되었는데, 요절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도 이벽의 행적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의 대표 저서로 역사, 문학, 천문, 종교, 농업, 의학 등 1,400가지의 항목을 다룬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벽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벽, 가장 먼저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

 

김대건 신부는 1845년 3~4월에 쓴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에서 이벽에 대해 언급하였다. “가장 먼저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요한 세례자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하느님의 교리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즉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 동지사 사절단이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3인자인 서장관의 아들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이벽을 찾아가서 자기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또한 다블뤼 주교도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이벽의 기록을 여러 차례 그리고 감동적으로 남겼다. “북경으로의 자네의 여행은 하늘이 참 교리를 알리기 위해 우리에게 준 하나의 놀라운 기회일세. … 이 교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 마차에 내리면 즉시 천주당으로 가서 서양 학자들과 상의하고 모든 것을 문의하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규명하고 천주교의 모든 실천에 관하여 자세히 문의하고, 필요한 책들을 모두 갖고 오게. 생사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수중에 있네. 가게.”

 

이벽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받아온 책들을 공부하고 즉시 전교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많은 이들이 이벽의 확신에 차고 예리한 논리에 감화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고 유림들이 천주교를 맹렬하게 공격하자 이벽의 아버지는 이벽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심지어 이벽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며 목을 매기까지 했다. 이벽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보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보았다. 다블뤼 주교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떻게 하느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게 버려둘 수 있는가? … 1786년 그는 유행하던 페스트에 걸렸다. 그에게 쏟은 아낌없는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33세의 나이에 죽었다.”

 

진리의 빛은 언제나 그것을 찾는 사람의 눈에 띄기 마련이고, 또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라면 진리가 주는 감동에 무감각하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최후의 순간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저 교우들이 그에게 통회를 권하고 천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의 곁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는 다블뤼 주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혹여 그러지 못했다 하더라도 좋으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계획 안에 쓰셨던 이벽의 영혼을 당신 품 안으로 불러 안으셨을 것이다.

 

[평신도, 2018년 봄호(VOL.58), 글 ·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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