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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알프레드 델프 신부 (4) 전쟁 속 태어난 새 생명에 하느님 유산 물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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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1151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알프레드 델프 신부 (4 · 끝) 전쟁 속 태어난 새 생명에 하느님 유산 물려줘

 

 

- 알프레드 델프 신부.

 

 

알프레드 델프 신부는 1945년 1월 11일 헬무트 몰트케 백작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교수형 선고를 받는다. 그 날의 심경을 그의 편지글에서 볼 수 있다. 

 

“저는 지금 내적으로 매우 특별한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아마도 은총을 주시고 죽는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여전히 기적을 믿어야 할까요? 제가 쓴 적이 있지만, 찬미와 봉헌이 주님 공현 관상의 마지막 언어였습니다. … 자유롭게 사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저를 위해 기도하고 저도 여러분을 위해 돕겠습니다. 여러분을 곧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모든 사랑과 덕행 그리고 신뢰에 감사합니다. 제 기분이나 미완성 그리고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모든 친구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장차 오게 될 것은 여러분과 이 민족을 위한 씨앗으로 축복과 희생 속에 주어진 것입니다.”

 

1월 23일 몰트케 백작과 다른 두 명이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그리고 관구장이었던 뢰쉬 신부도 ‘크라이스아우 크라이스’ 사건에 연루돼 1월 중순 체포됐다. 2월 2일 오후 델프 신부는 교수대로 향하며 그동안 돌보아준 부흐홀츠 신부에게 농담을 건넨다. “신부님, 잠시 후면 제가 신부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답게 사느냐다. 델프 신부는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었으니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지평에 서 있었다. 하느님이 보여 주실 새 땅과 새 하늘을 기다리며. 

 

델프 신부가 처형된 다음날인 2월 3일 베를린에 지옥의 유황불이 쏟아지듯 폭격이 시작됐다. 이 폭탄 세례에 델프 신부를 심판한 프라이슬러 재판관이 죽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델프 신부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1월 23일) 한 친구 부부는 새 생명을 낳았다는 소식을 알린다. 이 젊은 부부는 델프 신부에게 대부가 되어주기를 간청했고, 아이 이름에 델프 신부의 첫 이름인 알프레드를 붙여 주었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세세대대로 전해지는 것일까. 전쟁의 폐허 속에 태어난 새생명 알프레드 세바스찬을 위해 남긴 델프 신부의 편지는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한 순간순간을 죽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남긴 글이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시간 속에서 항상 기다리는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사랑하는 알프레드 세바스찬, 나는 너의 이름에 또 하나의 짐을 유산으로 보태고 싶다. 너는 또한 나의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서로 제대로 사귀지 못하게 되지만 네가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이해해 주기를 나는 바란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내 인생을 투신한, 아니 내 인생에 던져진 의미라고 해야겠지.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사랑을 증가시키는 일, 즉 사람들이 하느님의 법에 따라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살고 이를 통해서 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우리 인간이 몰린 커다란 곤궁에서, 사람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버린 이 곤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고 싶었고, 지금도 도우려 한다. 하느님을 숭배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며 자유롭게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통찰과 과제로서 그리고 부탁으로 주고 싶은 것이다.

 

사랑하는 알프레드 세바스찬, 한 인간이 자기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은 많다. 단지 힘과 정열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내가 지금 뮌헨에 있을 수 있다면 우선 너에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즉 나는 우리 모두가 불림을 받은 하느님의 존엄에 네가 참여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한번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를 품위 있게 변화시킨다. 우리는 그 순간부터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된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언제든지 도와주고, 하느님 스스로 우리 생명과 더불어 사시며, 이 생명은 언제나 그렇게 머물 것이고 점점 더 커져 간단다. 나의 아이야, 한 인간이 결정적인 가치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리고 그가 귀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나의 사랑하는 알프레드 세바스찬, 나는 여기 아주 높은 산 위에서 지내고 있다. 사람들이 소위 삶이라고 일컫는 것은 저 아래 저 혼미하고 희미하게 먼 곳에나 있다. 여기 위에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신적인 고독이 서로 대화하듯 함께 만나는 곳이다.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는 빛을 견디지 못한다. 강인한 가슴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도 더 숨을 쉴 수가 없다. 적적하고 좁은 고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현기증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락하여 사사로움과 간계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알프레드 세바스찬, 이것이 바로 너의 인생을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밝은 눈, 강인한 가슴 그리고 자유의 고도를 쟁취하고 견디어 내는 능력. 이것들을 단지 너의 신체와 외적인 성장 그리고 운명에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내적인 자신, 너의 혼에 훨씬 더 기대한다. 그리하여 네가 흠숭하고 사랑하고 자유롭게 봉사하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너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너를 축복하고 인도하시기를…. 

 

너의 대부 알프레드 델프

 

추신 : 이 글을 나는 사슬에 묶인 손으로 썼다. 이 사슬에 묶인 손을 나는 너에게 유언으로 양도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사슬을 지며, 이 사슬 안에서 스스로 항구히 머무르는 자유를, 너에게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더 안전하게 주어지게 될 이 자유를 유언으로 양도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22일, 김용해 신부(예수회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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