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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제주 4·3,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제주 4·3 70주년과 한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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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1504

[경향 돋보기 - 제주 4·3,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제주 4·3 70주년과 한국 교회

 

 

70년 동안 정식 명칭이 없는 제주 4·3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출신이 아닌 우리나라 내륙에 사는 사람을 ‘육지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 4·3 사건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은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올해로 발생 70주년을 맞는 제주 4·3 사건은 육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고,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맺힌 이름이다.

 

제주 4·3 사건은 정식 명칭이 없다. 제주 4·3 사건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 항쟁’, ‘제주 4·3 폭동’, ‘제주 4·3 학살’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아직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제주 4·3 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제주 4·3 사건이란

 

아마도 ‘제주 4·3 사건’이란 이름만 들으면 먼 옛날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 사태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먼저 언급해 본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시민 3만여 명이 참가한 ‘3·1절 기념 대회’로 시작되었다. 이어 3월 10일 제주도 직장인 95%에 해당하는 4만여 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가 27만여 명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주민이 기념 대회와 총파업에 참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군정이 다시 기용한 일제 강점기의 경찰과 육지에서 지원 온 경찰, 서북청년단 회원들은 총파업에 가담한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경찰에 끌려가 고문으로 사망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당 사람들이 경찰 지서 열두 곳과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를 급습하면서 총파업은 무장 투쟁으로 변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주도 소요 사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의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더불어 이곳 주민들을 모두 해안 마을로 이주시키는 소개령도 발표하였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로부터 약 4개월간 정부의 주도로 진행된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의 95%가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곳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좌익에서 전향했거나 반강제적으로 등록된 보도연맹 가입자나 입산자 가족에 대한 예비 검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수많은 이가 체포되어 학살당했고, 제주 4·3 사건과 관련하여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제주 4·3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으로 사형을 당했다.

 

이러한 비극적 양상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비로소 막을 내린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 7개월 동안 고립된 섬 제주에서 당시 주민의 10분의 1이 넘는 3만 여명의 사람이(정부의 진상 조사 보고서 추산) 희생된 엄청난 비극으로 남았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하나인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미군정의 실정을 바로잡고자 하는 항쟁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4·3 사건’으로 규정짓기보다, 1947년 3월 1일의 ‘3·1 사건’으로 규정할 때 이 사건이 지닌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있고 정식 명칭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4·3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

 

제주 지역 사회는 오랜 세월 친족 공동체를 이루며 화목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이라는 비극을 경험하였고, 이 사건이 종결된 뒤에도 계속되는 갈등과 반목에 직면해야 했다. 제주 4·3 사건으로 말미암아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들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을 달고 살아야 했고, 갖은 불이익도 감내해야 했다. 다른 편에 서서 적으로 간주하고 서로를 죽였던 이들, 그들 사이의 폭력적 대립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 상처를 입고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들은 대물린 반목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4·3’이라는 말은 한동안 제주에서 입에 담거나 글로 써서도 안 되는 금기어였다. 하지만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착수되었고, 2003년 10월 15일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확정되었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한 것이다.

 

2008년 10월 16일 특별법이 마련되면서 ‘제주 4·3 평화 재단’이 설립되었고, 이후 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문제들을 공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2014년 3월 24일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4·3 70주년을 기념하는 제주교구와 한국 교회

 

제주 4·3 사건 이전에도 제주도는 중국 원(元)나라의 군마 기지로 사용되면서 ‘목호의 난’이라는 참극을 겪었다. 또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자 제주도 전역을 군사 요새로 만들면서 수많은 무고한 주민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참혹한 아픔을 겪은 뒤에도 제주도를 군사 기지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되었다. 동북아의 패권 다툼 속에서 미국과 한국 정부가 제주도를 군사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주 사회는 또다시 극심한 갈등으로 치달았다. 제주도뿐 아니라 남북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는 현 상황에서 계층과 세대, 지역 간의 갈등과 대립을 겪은 한국 사회에 화해와 상생의 평화를 이루려면 제주 4·3 사건의 교훈과 정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올해 제주 4·3 7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 교회는 제주교구 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발의와 여러 주교들의 동의로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제주교구,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민족화해위원회가 공동으로 준비하여 기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의를 두고 오래전부터 제주 4·3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노력한 제주교구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여 이번 기념사업을 이끌도록 하였다.

 

먼저 지난 1월 18일과 19일 서울과 제주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어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가톨릭교회가 추진하려는 기념사업에 대해 안내하였다. 뒤이어 2월 22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 현대사에서의 의미’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사건의 원인을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더불어 지역 주민들이 상처와 아픔을 딛고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어떻게 노력했는지 고찰함으로써 제주 4·3사건이 지닌 정신과 가치를 조명해 보는 자리였다. 이날 심포지엄 자료집은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를 통해 배포하고 있다.

 

또한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와 함께 4월 1일부터 4월 7일까지 제주 4·3 70주년 특별 기념 주간을 보낸다. 특별히 4월 7일 오후 3시 명동성당에서 ‘제주 4·3 70주년 기념 미사’가 봉헌되고, 오후 6시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범국민위원회가 주관하는 국민 문화제가 열린다. 제주에서는 200여 명의 순례단을 구성하여 기념 미사와 국민 문화제에 참여할 계획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제주 4·3 사건 홍보 영상을 제작하여 배포한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제주 4·3 사건 70주년 기도문, 신앙 실천 7일 기도문,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한 십자가의 길과 성시간 프로그램, 그리고 4·3 유적을 방문하여 드리는 기도 등이 담긴 소책자도 제작한다. 이 자료는 파일로도 배부하여 각 교구에서 필요와 여건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에 제주 4·3 사건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전문 인력을 배치하여 제주 4·3에 대해 알고자 하는 학교나 단체가 있다면 전국 어디든 직접 방문하여 강연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또 각 교구의 단체 행사나 교육 행사, 신학교에서 마련한 특강을 통해서도 제주 4·3 사건에 대해 알릴 수 있을 것이다.

 

7월 제주교구 청소년사목위원회에서는 전국의 청년들을 제주로 초대하여 제주 4·3의 가치인 ‘평화 · 인권 · 관용 · 화해’의 정신을 공유하는 ‘전국 청년 4·3 평화 신앙 캠프’를 실시한다.

 

 

제주 4·3 사건을 기념하는 신앙인의 삶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지은 죄를 깊이 성찰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며, 솔직하고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이를 용서해 주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

 

폭력과 전쟁에서의 유일한 승리는 오직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거나 전쟁을 추구하려는 그 어떤 시도나 명분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천주교 신자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이에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제주도와 한반도가 다른 나라들의 전쟁터로 사용되지 않고, 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폭력적 대립과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된 수많은 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며, 이 땅에 평화를 이루는 일이 될 것이다.

 

* 황태종 요셉 - 제주교구 신부. 제주교구 선교사목위원장으로, 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황태종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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