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2) 평화학이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5 ㅣ No.1470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2) 평화학이란 - ‘평화’에 대한 감수성 높여야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성 침해받지 않도록 연구

 

 

누구나 처음 대하는 광경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와!”하는 탄성을 질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런 감동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이질적인 경험, 혹은 기대나 상상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커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이러한 감동의 실재는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창세 1)고 하신 ‘한처음’의 모습에 맞닿아 있다. 성경에서는 흠 없으신 주님 사랑의 완전한 구현을 ‘평화’라고 이름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평화롭지 못한 평화’, ‘거짓 평화’가 횡행하고 있다. ‘평화학’은 이 거짓의 껍데기를 벗겨 하느님께서 좋아하신 온전한 ‘한처음’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모든 인류가 함께 누려야 할 주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외치는 세력들에 의해 ‘거짓 평화’마저 독점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학문으로서 평화학은 이런 현실 속에서 잉태되었다.

 


평화학이란

 

평화학(Paxology·Peace Studies)은 말 그대로 ‘평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평화를 연구한다는 관점에서 ‘평화 연구’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평화학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이 확산되는 가운데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인류 이성의 산물, ‘인류 생존의 과학’으로 탄생했다.

 

따라서 학문으로 성립되던 초창기에는 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에 주안점을 두었다. 평화에 대한 인류의 이성과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평화학은 점차 ‘남북문제’ 등으로 인해 파생되는 빈곤, 기아,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 등 인간성 실현을 저해하는 폭력을 없애기 위한 ‘적극적 평화’로까지 확장됐다.

 

평화학은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갈등 형태와 상황에 적합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다. 이처럼 평화학은 ‘평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지향과학이다. 동시에 평화교육과 평화운동 등 다양한 실천과 연계된 실천적 학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평화학을 정립한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1969년 발표한 논문 「폭력, 평화 그리고 평화 연구」에서 폭력을 신체적 피해를 가하는 물리적 힘의 발휘 정도로 이해하던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었다. 폭력이 사회구조에 내재화된‘구조적 폭력’ 개념을 제시했다.

 

갈퉁에게 ‘구조적 폭력’의 가장 중요한 차원은 불평등 문제다. 권력이나 자원의 배분에 있어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 개인이나 집단은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잠재적 실현 가능성과 실제 실현 수준 사이의 간격을 줄이려는 노력이 억제되는 사회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평화학에서 말하는 구조적 폭력은 사회구조의 불평등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인 과학인 평화학은 ▲ 평화사상사(종교 및 철학) ▲ 전쟁 비판 및 원인 분석(전쟁을 없애는 길) ▲ 사회 내 폭력 부조화(폭력의 정당화 요인) ▲ 비판적 안보론(전면적 전쟁 비판 및 재검토) ▲ 갈등학(갈등 요인 분석 및 대응) 등을 주요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평화학의 아버지 요한 갈퉁

 

‘평화학의 아버지’, ‘평화 연구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요한 갈퉁은 1930년 노르웨이 오슬로의 대대로 의사를 배출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0대였던 갈퉁은 오슬로 부시장이던 아버지가 나치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평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평화에 대한 갈퉁의 의지는 그의 젊은 시절 선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했다.

 

갈퉁이 본격적으로 ‘평화 연구’를 시작한 것은 29살 때다. 그는 1959년 오슬로에 ‘평화연구소’(Peace Research Institute Oslo)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평화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1963년에는 「평화연구저널」(the Journal of Peace Research)을 창간했다. 같은 해 세계평화학회를 발족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평화 구축과 분쟁 해결을 개념화해 세계 유수 대학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평화연구소를 세우는데 기초를 제공해왔다. 그가 평화에 대해 쓴 책은 160권에 달한다. 평화는 반드시 평화적 수단에 의해 성취돼야 한다고 역설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가 대표작이다. [가톨릭신문, 2018년 2월 4일, 서상덕 기자]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가톨릭대 ‘평화학개론’ 강의 공동 개발한 최혜영 수녀


“일상서 비폭력 넓혀가는 노력 필요”

 

 

- 최혜영 수녀. 사진 정다빈 수습기자.

 

 

가톨릭대학교(총장 원종철 신부, 이하 가대)는 올해 3월 새 학기부터 종교학과에 ‘평화학개론’ 강의를 개설하고 ‘평화학’의 저변을 넓힌다. 가대는 지난해 국내 처음으로 ‘평화학’(Peace Studies) 전공 신설을 시도해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최혜영 수녀(종교학과 교수 · 성심수녀회)는 강의를 맡을 이대훈(프란치스코 · 성공회대 NGO대학원) 연구교수와 평화학개론을 공동 개발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를 ‘평화올림픽’으로 기대할 만큼 ‘평화’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한민족의 키워드가 되고 있지만 막상 학부 과정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어 안타까웠다는 최 수녀. 평화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고 사회 현상 저변에 깔린 갈등과 폭력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경직된 체제에 오랫동안 젖어있다 보니 적대적 감성이 일상화돼 있습니다. ‘평화’란 전쟁에 반대되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폭력을 비폭력, 평화로 만들어가는 감수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최근의 평화 연구가 “무력을 통한 분쟁해결 욕구를 아래에서부터 변화시켜야 한다는 폭력 구조의 전반적인 변화와 대안적인 사회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평화’라고 하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일상에서 비폭력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덧붙인 그는 “평화 문제를 성찰한다는 것은 빈곤, 인권, 인종, 젠더, 국제관계, 사회변동 등 일상에 깊숙이 연관돼 있는 폭력의 구조성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특히 서열 문화가 두드러지는데, 아이들 대화에서도 ‘너 나이가 몇 살이야. 내가 형이네’ 등 서열화된 사회의 고정 관념이 드러난다. 이러한 서열적 우리말 배우기도 폭력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대한 강요된 관습도 마찬가지다.

 

신약성경을 전공한 최 수녀가 이론적·실천적으로 ‘평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1982년 경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버나드 벤슨의 동화책 「평화」를 접한 그는 ‘평화는 어린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깨달았다. 

 

이후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2014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미국 듀크대 화해센터 주관의 ‘그리스도인 동북아 화해 포럼’ 등에 참가하면서 평화 문제에 좀 더 깊이 다가설 수 있었다.

 

최 수녀는 ‘일상 안에서의 평화 감수성 키우기’를 강조하면서 “신앙인들은 성경 안에서 평화의 비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샬롬’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평화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정신이 평화학의 핵심입니다. 복음 정신대로 살면 평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다짐과 결심, 실천의 문제입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2월 4일, 이주연 기자]



8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