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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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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22 ㅣ No.1101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기도드리는 법을 좀 더 잘 알고 싶고, 또한 하느님께 마땅한 기도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그 이유는 기도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이며 그분께서 내리시는 은총을 충전하는 시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기도를 드리는 시간은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을 올리는 시간이고, 성경을 읽는 시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내리시는 시간”이라고 가르치셨다.

 

이 바람을 사도들도 똑같이 가졌으리라! 「성경」 말씀에 따르면, 사도들은 주님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하고 부탁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청을 기꺼이 들어 허락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마태 6,9-13; 루카 11,2-4 참조).

 

 

기도의 스승이신 주님

 

예수님은 기도의 선생님이시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연필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 뒤 선을 긋고 원을 그리면서 글자를 쓰기 시작한다. 그 가르침 없이도 혼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울 수는 있으나 훨씬 더디고, 또 복잡해지면 잘못 배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훨씬 빨리, 쉽게, 그리고 옳게 기도에 입문할 수 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기도드릴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기도의 대가들, 곧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천주의 요한 성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에디트 슈타인 성녀처럼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에디트 슈타인 수녀가 성체 앞에서 밤샘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어떤 분이 “수녀님, 많이 피곤하시죠?” 하고 물었다. 그러자 수녀는 대답하였다. “피곤하다니요? 기도는 저를 힘이 넘치게 만들어 줘요.”

 

 

주님의 기도의 가치

 

내적 힘의 원동력인 이 기도를 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예언자나 영적 스승들이 제자에게 전수해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최고의 비법이었다. 세례자 요한도 제자들에게 기도 방법을 가르쳤다. 주님의 제자들은 가장 훌륭한 스승에게서 참된 기도를 배우는 특은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는 주님의 기도는 큰 선물이며, 최상급 표현의 과용을 삼가야 옳지만, ‘이 주님의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정신을 호흡하게 되며,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끝없이 많은 축복을 가져다준 가장 완전한 기도를 만난다. 비신자까지도 주님의 기도를 알고 있을 정도로 하느님과 인류 전체를 이어 주는 연결선이며, 언어가 불가능해지고 의식이 꺼져 가는 임종자조차 무의식중에 바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해 주는 최후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귀중한 보물 기도이다.

 

테르툴리아노는 주님의 기도 안에 모든 복음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현존하는 기도 가운데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칭하면서 주님의 기도 안에 모든 청원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청하는 순서와 방법까지도, 그리고 기도의 느낌까지 완전하게 가르쳐 주는 기도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공부한다는 것은 복음 전체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뿐 아니라 모든 교부가 인지하였다. 유명한 교부들, 곧 알렉산드리아의 대신학자 오리게네스(+253년),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노(+220년), 치프리아노(+258년), 아우구스티노(+430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153년)등 여러 교부가 주님의 기도 해설에 노력을 기울였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바치신 이 기도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그리스어로 전해졌고, 그 뒤에 라틴어로 전수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수많은 나라의 말로 바쳐지고 있다.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 있는 엘레오나 성당의 벽에는 세계 60여 개국의 언어로 새겨진 주님의 기도를 볼 수 있다. 한국어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주님의 기도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주님의 기도는 이미 초세기 때 곧바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 안에, 그리고 공동으로 드리는 전례 안에 흡수되었다. 이 기도는 ‘사도 신경’과 함께 초대 교회 때부터 존재하는 오래된 기도문이다. 서기 100년에 생겨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규칙서인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에는, “모든 신자는 주님의 기도를 하루 세 번 드리라.”고 명시되어 있다(8,2).

 

성 암브로시오 교부는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언급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바로, 저녁에 자기 전에 바치라고 권고하였다. 주님의 기도는 특별히 전례 안에서, 성스러운 미사성제 안에서 최고의 합당한 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때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특히 미사 중 영성체 전 식탁 기도로 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1500년이 넘도록 사용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기도는 큰 존경의 대상으로 소중히 다루어져야 마땅하다고 교부들이 가르쳤다.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는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받기 불과 며칠 전에 비로소 주님의 기도문을 장엄하게 전해 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 이유는 주님의 기도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모독당하지 않게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에는 공공장소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첫마디와 마지막 마디만을 소리 내어 바치고 그 외 부분은 비밀 규칙으로 묶어 조용히 기도드리게끔 지도하였다. 주님의 기도가 공공연하게 속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에 따른 조치였다.

 

 

주님의 기도 내용

 

주님의 기도에는 실제로 일곱 가지 청원 기도가 내포되어 있다. 전반부 세 가지는 하느님과 관계된 청원으로서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내용이며, 후반부 네 가지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기도의 모범이 될 표준을 세워 주셨다. 주님의 기도는 그 자체로 기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완전한 지침이며 길이다. 늘 먼저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그다음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순서를 가르쳐 준다.

 

 

주님의 모범

 

예수님께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접한다. 예수님께서 아주 열심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도 복음에서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1-2). 그리고 바로 이어서 주님의 기도를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시급한 일이 많았다. 배움에 목마른 군중과 병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각처에서 몰려들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분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사랑의 행위도 보류하시며 외딴곳으로 가셨다(마르 1,35 참조). 또한 가끔 밤새우며 기도하셨다(루카 6,12 참조).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알맞은 장소와 시간을 신중하게 택하셨고, 어떠한 일이든 제쳐 두고 먼저 기도하셨다. 기도의 장소는 주로 산이었다(마르 6,46 참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다(루카 9,28 참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이다(마태 26,30 이하 참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어 계실 때도 기도하셨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예수님께서는 절망 상태에서도 기도하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운 순간에 드렸던 기도로서 시편(22,2)에서 인용한 기도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또한 시편(31,6)에 나오는 기도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기도 없이 생활할 수 있겠는가?

 

*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2016년에 은퇴한 원로 사목자로 현재 강화꽃동네 성녀 헬레나 성당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지낸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1월호, 장인산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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