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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12) 사제품 받고 가난 · 정결을 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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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2 ㅣ No.1033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12) 사제품 받고 가난 · 정결을 서원하다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를 모토로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성인. 사진은 로욜라 생가에 장식된, 회헌을 들고 있는 이냐시오 성인 모습.

 

 

파리에서 문학과 신학 공부 

 

마침내 1528년 2월 2일 이냐시오는 홀로 걸어서 파리에 도착했다. 당시 파리는 서구 세계 지성의 중심지였다. 파리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1만 2000여 명 정도였으며 이들 중 반은 외국인이었다. 이냐시오는 지성적 분위기에서 매우 겸손되이 공부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고 학생들은 사도라고 상상하며 선생님이 이냐시오에게 명을 내리면 그리스도께서 명을 내리시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그에게 일을 시키면 성 베드로가 시키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냐시오는 1533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파리를 떠나기 전 일 년 반 동안에는 신학을 공부했다. 

 

이제 이냐시오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공인한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됐다. 비록 신학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이냐시오는 신학 용어나 베드로 롬바르도의 명제집이나 토미즘과 같은 당시의 신학 흐름에 친숙하게 됐다. 이러한 학문적 배움으로 이냐시오는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신학 용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됐으며, 「영신수련」 저술을 완성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을 얻었다. 

 

파리에서 공부하며 이냐시오는 영성 사도직을 계속했고, 자신과 뜻이 같은 여섯 명의 동료를 모았다. 이들은 피에르 파베르(1506~1546, 2013년 시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1622년 시성), 니콜라스 보바디야 (1508~1590), 시몬 로드리게스 (1509~1579), 디에고 라이네즈 (1512~1565), 그리고 알폰소 살메론 (1515~1585)였다. 이들은 서로 일치해 있었고 급기야 서원을 하게 된다. 이때를 성 파베르 신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영신수련을 통해 같은 결정으로 이미 일치된 우리 모두는 (그러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때까지 아직 영신수련을 받지 않았다.) 파리 근처의 몽마르트르 성당으로 갔다.” 

 

이 서원은 당시 유일한 사제였던 피에르 파베르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피에르 파베르 신부가 성체를 들고 있는 동안 다른 동료들이 서원을 했다. 이로써 예루살렘에 가서 살면서 영혼을 돕고 싶다는 이냐시오의 꿈은 몽마르트르 근처의 작은 경당에서 한 서원을 통해 공동체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공유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원 내용과 이 서원을 이행할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뒀다.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영혼들에게 봉사하는 데 생애를 바친다. 예루살렘에 체류할 허가를 받지 못하면 로마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대리자께 자신들을 바친다. 교황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영혼들의 봉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어느 곳에든지 그들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베니스에서 일 년간 선편을 기다리기로 하고, 만일 한 해 동안 동쪽으로 가는 배편이 없으면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그들의 맹세에서 풀려나 교황을 찾아가 계획대로 행동한다는 차후 계획도 세워뒀다.” (「자서전」 85항)

 

 

몽마르트르에서 열매 맺은 하느님 섬김의 비전 

 

교황께 대한 이 서원을 통해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의 성소는 교황과 연결됐다. 즉, 그들의 성소는 본질적으로 교회적이었던 것이다. 로욜라에서 회심 후 “하느님의 기사로서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이냐시오의 꿈은 만레사에서 작성한 「영신수련」의 ‘두 개의 깃발’ 관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동료들을 모았듯이 자신도 동료들을 모아 공동체로서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였던 공동체의 비전으로 발전했고, 이 비전은 몽마르트르에서 열매를 맺었다. 이 공동체적 차원의 비전은 이제 교황에게 파견을 받음으로써 교회 차원으로 더욱 발전했다. 실제로 마침 그 해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가 없어,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나중에 1539년 로마로 가서 교황이 자신들을 어디든지 파견하도록 했다. 로마는 그들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이 된 것이다.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몽마르트르 경당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서원 외에, 두 개의 서원을 더 했는데, 그것은 바로 가난 서원과 정결 서원이다. 이냐시오가 가진 꿈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처럼 “가난 중에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아직 수도회를 설립할 계획이 없어, 순명 서원을 하지 않았다.

 

1537년 이냐시오는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고해성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됐고, 말씀의 사도직을 공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즉 영혼을 돕는 데 공식적으로 승인된 방식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몽마르트르에서 개인적 차원의 서원이 아닌, 가난 서원과 정결 서원을 공식적으로 했다.

 

 

적극적 의미의 가난 실천 

 

이냐시오에게 가난을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허(kenosis, 스스로 자신을 비우고 낮춤)였다. 가난은 영적인 가난뿐만 아니라 실제적 가난을 포함했다. 즉, 단순히 무엇을 소유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이에게 내어 주고 나누어 준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냐시오는 가난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로마로 가는 길에 있는 비첸사라는 곳에서 이냐시오가 라이네즈와 파베르와 함께 머물게 된 일화를 살펴보자. “순례자 (이냐시오)는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비첸사로 가게 됐다. 그곳 교외에서 문도 없고 창도 없는 집을 한 채 구했다. 그들은 가지고 간 짚을 깔고 자면서 그 집에서 기거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시내로 들어가 하루에 두 차례씩 항상 구걸했으나 끼니를 잇기엔 부족할 정도밖에는 얻지 못했다. 그들은 빵이 있을 때는 구워서 먹고 지냈으며 집에 남은 한 명이 빵 굽는 일을 맡았다. 이렇게 지내면서 그들은 기도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않고 40일을 지냈다.” (「자서전」 94항) 

 

이렇게 비첸사에서 지내는 동안에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은총을 매우 풍성히 받았다. 그에게 비첸사는 바로 “두 번째 만레사”라고 일컬을 만큼 은총의 장소와 시간이었다. 그래서 예수회에서는 비첸사에서 이냐시오가 보낸 시간을 모체로 해 서품 후에 다시 영적 쇄신을 할 수 있도록 “제삼 수련”의 시간을 갖도록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1일, 김용수 신부(이냐시오영성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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