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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무덤 소재지와 이장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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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27 ㅣ No.1626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29일) 3주년 - 복자들 무덤 소재지와 이장 현황


순교의 길 당당히 걸으신 복자들 묘소는 지금 어디에?

 

 

- 지난 4월 28일 청주교구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 이장위원회가 오반지 복자의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순교자들은 대부분 유해가 없다. 묘소 또한 있을 리 없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복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박해에도 ‘죽음을 무릅쓴’ 동료와 가족들의 노력으로 수습된 순교 복자들의 유해는 비밀리에 매장됐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묘소가 남아 있어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묘소가 남아 있는 복자들은 124위 중 18위(14.5%)다. 유해를 남겼든, 남기지 못했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낸 순교 복자에 대한 공경은 유해가 있고 없고와는 상관이 없다. 복자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는 데도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 피를 흘리며 동화되는 순교의 길을 걸은 복자의 묘소를 통해 우리는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 번째로 맞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복자 기념일’을 맞아 복자의 무덤 소재지와 이장 현황을 살폈다.

 

지난 4월 28일 청주교구 윤병훈 신부 등이 오반지 복자의 유해를 관에 모시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복자 오반지(바오로, 1813∼1866)의 유해가 4월 29일 배티순교성지 경내로 이장됐다. 충북 진천군 사석리 산 109의 1, 일명 ‘오소리버덩’에 있던 복자의 묘소를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815, 815-1로 옮겨 신자들이 복자를 공경하는 데 접근성을 높였다. 특히 이번 이장에서 복자의 유해 일부가 가톨릭대 의대 응용해부학연구소 이우영 박사에게 인계돼 의학적 처리를 거쳐 교구 내 서운동ㆍ진천ㆍ이월 본당과 배티성지 등에 분배될 것으로 전해지면서 복자 공경과 함께 124위 복자의 무덤 소재지에 교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 다른 복자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구 순교자 신석복(마르코, 1828∼1866)ㆍ박대식(빅토리노, 1812∼1868) 복자의 묘소는 모두 김해에 있다. 대구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신석복의 묘소는 김해 노루목(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장항)을 거쳐 진영성당 묘지(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로 옮겨졌다.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대식의 유해는 김해 차골, 지금의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차골(茶谷)에 매장됐고, 1956년에는 봉분을 확장하고 부인의 묘를 그 옆으로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과 그의 맏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동정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장조카 유중성(마태오, ?∼1802) 묘소는 유항검의 부인 신희, 제수 이육희를 포함하는 7위 합장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옥과 전주성 남문 밖, 숲정이 형장에서 순교한 유항검 일가의 묘소는 전주 초남리ㆍ제남리를 거쳐 전주 치명자산(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11-1)으로 이장됐다. 

 

1868년 무진박해로 체포된 이양등(베드로, ?∼1868) 회장과 김종륜(루카, 1819∼1868)ㆍ허인백(야고보, 1822∼1868) 복자는 그해 9월 14일 울산병영에서 함께 순교했다.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가 시신을 거둬 비밀리에 울산 동천강 변에 안장했다. 이들의 유해는 진목정 인근 도매산(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산365), 구 감천리 묘역, 감천리 묘역 성모상 앞을 거쳐 지금은 대구 복자성당(대구광역시 동구 송라로 22)에 안장돼 있다.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인 구한선(타대오, 1844∼1866)ㆍ정찬문(안토니오, 1822∼1867)ㆍ윤봉문(요셉, 1852∼1888) 등 3위는 진주에 커다란 신앙의 빛을 비췄던 복자들이다. 

 

경남 함안의 미나리골 중인 집안 출신인 구한선 복자는 진주옥에 갇혀 수난을 당하다가 석방돼 집으로 돌아온 지 7일 만에 선종,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새터(新垈) 신씨묘역에 묻혔다가 가등산 교우묘역(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733-1)을 거쳐 대산성당(함안군 대산면 구혜리)으로 이장됐다. 

 

진주 허유고개 중촌 출신인 정찬문 복자는 1866년 말 진주포졸에게 체포돼 진주진영 내 군뢰청 옆 옥에 갇혔다가 1867년 1월 말 교수형을 받았고 유해는 그의 조카들이 거둬 장사를 지냈다. 훗날 머리 없는 주검으로 발견돼 마산교구 문산본당 사봉공소 관할 구역 내 허유고개(경남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1751번길)를 거쳐 경남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사봉공소로 옮겨졌다. 

 

경북 경주 인근 출신인 윤봉문 복자는 1888년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통영에 압송돼 문초를 받았고, 진주옥으로 이송돼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그해 4월 1일 순교, 진주 비라실(장재리), 거제 진목정 족박골(경남 거제시 옥포2동)을 거쳐 윤봉문요셉성지(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로 옮겨졌다.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자신의 대자 양재현(마르티노, 1827∼1868)과 함께 동래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이정식(요한, 1795∼1868) 복자는 동래 명장동(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산96)을 거쳐 현재 오륜대 순교자묘역(부산시 동래구 부곡3동)에 안장돼 있다. 

 

정약현ㆍ약전ㆍ약종ㆍ약용으로 이어진 나주 정씨 4형제 중 유일하게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 광주 웃배알미리(경기도 하남시 배일미동), 반월 사사리(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를 거쳐 천진암성지(진토묘)로 이장됐다. 

 

124위 중 안동교구의 유일한 순교복자인 박상근(마티아, 1837∼1867)은 이서(吏胥), 곧 아전을 지낸 인물로, 1867년 1월 상주옥에서 순교, 마원리 박씨 묘역을 거쳐 마원성지(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로 이장됐다. 

 

1795년 순교한 ‘교회 밀사’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야고보, ?∼1801)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양근 관아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했고, 그해 4월 27일 양근 관아 서쪽 큰 길가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후 이천 어농리(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에 안장됐으며, 훗날 유해 발굴을 거쳐 확인한 뒤 재안장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2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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