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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내 삶을 흔든 작품: 나의 영원한 스승 알빈 신부 - 평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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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22 ㅣ No.130

[내 삶을 흔든 작품] 나의 영원한 스승 알빈 신부 - 평화성당


부산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가끔 해운대에 나가 바닷바람을 쐬고는 하였다. 그때 해운대 가는 초입의 언덕 위에 내 눈길을 끄는 하얀 건물이 있었다. 소박하지만 너무나 멋진 현대식 건물이었다. 일부러 버스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 돌아보고는 하였는데 그땐 그 건물이 한독실업학교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뒤 대학시절 방학 때 서울 부산을 오갈 때마다, 그리고 건축답사를 다닐 때 왜관, 김천, 구미, 황간 부근에서도 비슷한 아름다운 건물을 만났다. 다 작은 언덕 위의 성당들이었고 난잡한 건물들 속에 조용히 숨어있는 보석 같은 존재들이었다.

대학원에서 건축사를 전공하고 한국근대건축사로 논문을 쓰면서 그 건물이 왜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 많은 건물이 한 독일인, 그것도 수도자인 성베네딕도회 알빈(Alwin Schmid, 1904-1978년) 신부님이 설계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설계한 성당을 시간 나는 대로 순례하는 것이 오랫동안 즐거운 습관이 되어버렸다. 평면을 스케치하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신부님, 수녀님과 대화도 나누었다.

그분이 설계한 건물은 우선 단순한 형태에 기능에 충실하며, 군더더기가 일절 없을 뿐 아니라 주변과 잘 조화되는 순수한 근대건축이었다. 그분에 대한 몇 편의 글도 발표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의 배려로 그분의 작업실과 도면도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그분의 설계에는 전례와 신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담겨있었다. 그 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감동을 준 건물은 알빈 신부의 국내 첫 작품인 김천에 있는 평화성당(왼쪽 사진)이다.


김천 평화성당

평화성당은 김천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김천역에서 불과 5분 거리의 평화동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경사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 성당의 초입에 들어서면 우선 측면과 배면의 단순하지만 적절히 분절된 하얀 콘크리트 매스(mass)를 대하게 된다. 사각형 창살과 검소한 외관이 전혀 성당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박한 건물이다. 그렇다고 개신교 교회당은 더더욱 아니다.

종탑을 돌아 정면에 이르면 7성사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출입문이 어떤 이의 방문이라도 환영하듯 나있고, 이 문을 통해 내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그때서야 범상치 않은 건물임을 느끼게 된다.

성당 정면에서 보면 좌측에 연결된 사제관, 가운데 일곱 개의 출입문, 그리고 우측 모서리의 종탑이 비대칭적이며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면은 장방형으로 주랑(nave)과 측랑(aisle)의 구분이 없는 강당 형태이지만, 내부공간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五傷]를 상징하는 천장의 다섯 줄의 직선적 패턴이 제대 뒤편 십자가와 감실에까지 연결되어 제대를 향한 장축의 강한 방향성을 구현하고 있다.

내부공간도 외관만큼 단순하고 검소한 재료로 마감되어 있다. 색유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창살 나누기와 깊은 루버로 다양한 자연광을 끌어들인다. 다만 제단 벽에는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작은 창을 뚫었는데 여기에만 독일에서 가져온 엷은 색의 두꺼운 색유리(slab glass)가 끼워져 있다.

제대 우측 벽면에는 세례대가 놓였었는데 그 배경에는 성령의 은혜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불혀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물을 붓는 세례 장면이 그려져 있다.

평화성당은 1958년 김천황금성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는데 당시 황금성당의 주임인 독일인 신부가 성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에서 미술과 제도를 강의하던 알빈 신부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지은 것이다. 신비스러운 빛의 연출이나 장식적 치장이 아니라 재료와 구조의 솔직한 표현, 밝고 기능적인 공간구성으로 성스러움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국내 최초로 양식을 탈피한 성당건물이다.

성당 하면 붉은 벽돌에 뾰족한 종탑과 아치창, 깊고 어두운 삼랑식 공간에 익숙한 당시의 신자들에게 이 건물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알빈 신부는 1961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설계작업을 하게 된다.


나의 영원한 스승

나중에 성당을 직접 설계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분의 설계 원칙과 디자인 어휘를 따르고 있었다. 비록 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느덧 그분은 나의 스승이 되었다. 유럽의 현대교회 건축을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전례와 신학, 그리고 건축과의 관계를 비교해 보기도 하였다.

성베네딕도회 소속의 알빈 신부님은 대학에서 미술사와 조형미술을 공부하고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신부로서 사제품을 받고 만주 북간도의 연길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해방이 되고 공산군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독일로 추방당해 그곳 수도원에서 미술과 설계를 강의하였다.

평화성당의 설계를 계기로 한국에 정착하였으며,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0년 동안 이 땅에 122곳의 성당(경당, 공소 포함)을 포함하여 무려 185개에 달하는 가톨릭 건물을 설계하였다. 실로 대단한 작업이다.

그동안 건축계에 잘 알려지지 않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마도 세계 교회건축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분의 성당건축은 신학과 전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주변과 경제적 상황을 잘 고려하여 시골이든, 도시든 부담을 주지 않는 건물로 30-50년이 지나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한다.

몇 년 전 나는 20여 년간 답사하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성베네딕도회 한국진출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축가 알빈 신부」(분도출판사, 2007년)라는 제목으로 알빈 신부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한 책을 펴냈다. 책을 통해 신부님의 업적이 세간에 알려졌고, 이미 돌아가셨지만 2008년에는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하셨다.

그리고 그 책이 독일의 수도원에 전달되자 유달리 신부님을 따랐던 조카분이 독일의 온 가족 · 친척들로부터 수집한 신부님의 젊은 시절 사진, 스케치, 일기장, 작품사진들을 보내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알빈 신부의 생애와 건축, ‘하느님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 대우푸르지오밸리, 2008년).

가톨릭 신앙을 갖고, 적잖은 성당건축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요 알빈 신부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인데 일부나마 갚을 수 있어 기쁘다. 앞으로도 알빈 신부님과 그분의 작품은 내 마음 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살아있을 것이다.

* 김정신 스테파노 -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한국 가톨릭 성당건축의 수용과 변천과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복원설계, 북한 KEDO 종교동, 수원교구 송현성당 등 20여 곳의 성당을 건축하였으며, 「건축가 알빈 신부」 등 3권의 성당건축 관련 저서를 펴냈다. 문화재청, 서울시, 인천시 문화재위원이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으로서 가톨릭교회 건축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김정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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