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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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네 잎 클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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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194

  우리 농촌을 소개하는 KBS-TV의 ’6시의 내 고향’에서 ’네 잎 클로버’만을 따로 다량 재배하여 그 잎사귀로 액세서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선물용으로 예쁘게 가공하여 수출도 하고 국내 판매도 하며 짭짭한 수익을 올려 톡톡히 재미를 보는 농장을 소개하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머금어진 일이 있다.

  왜냐면 우리가 행운의 심벌로 여기고 있는 ’네 잎 클로버’는 ’정상적’인 클로버 잎이 아닌 장애를 지닌 ’비정상적’ 클로버 잎인 까닭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의 심벌로 여기고서 온 들판을 헤매며 찾기도 하고, 심지어는 앞의 경우에서 보듯 임의로 재배까지 하여 시장에서 판매에 들어갈 정도이니, 특히 그것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까지 한다.

  인식의 편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이 또한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물의 이치이다. 나는 우리 장애인 복지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키워드’를 오래 전부터 여기에서 찾아왔었다. 장애인 문제는 다름 아닌 편견의 문제인 까닭이다. 그 날 TV를 유심히 보며 "장애도 저토록 행운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 사회에 있구나!" 싶어 서글픔과 아픔이 묘하게 교차하는 고소를 금치 못했었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편견과 차별의식이 유별난 곳도 없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만이 아니라, 선거철만 되면 불거지는 지역감정이나 가부장제 아래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남아선호사상, 화교(華僑)는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학연·지연·혈연으로 뭉쳐지는 집단이기주의 등등을 보라. 그 원인에 무슨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인 요인이 있는지는 모르나, 무엇보다 그런 행태는 이 사회의 천박함과 미성숙함 그 후진성을 드러내 줄 따름이다. 마치 하나의 틀 속에 모두를 맞추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자 침대’같은 이 사회의 폐쇄적 구조는 ’닫힌 사회’의 병폐들을 모두 모아 놓은 쓰레기장 같다.

  물론 인간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인간 인식의 특성 때문에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를 현대 철학에서는 ’그런 틀 속에서는 그렇게 밖에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가치부하설(價値負荷說)’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의 세계관 곧 패러다임이란 결국 ’까짓껏’의 주관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이 모든 편견이나 차별에는 도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거기엔 무슨 뚜렷하고 정당한 이유가 없는 점이다. 객관적인 검증 절차나 공정한 잣대가 전혀 필요치도 요구되지도 않는 것이다. 오직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흑인이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그런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야 한다는 사실 그뿐이다. 편견과 차별을 받는 입장에서야 그야말로 ’억하심정’이겠지만, 거기에 도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인 잣대의 억지부림인 것이다. 그리하여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얼토당토아니한 이유들이 아주 당연한 듯이 거론되고 내세워지는, 그러한 천박한 인식이 낳은 편견과 차별 그 벽 앞에 서면 때론 그저 가슴만 탁탁 막혀 말문조차 열리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이러한 편견과 차별의 기본적 틀은, 장애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종차별이나 남녀간의 성차별, ’20 대 80의 사회’로 현실화되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구조, 신자유주의 문제로 대두되는 제3세계와 제1세계간의 남북문제, 지역·계층·산업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사회민주화문제, 남북한의 민족통일문제, 심지어는 지구생태계의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인식의 틀’과 놀랍도록 동일하다. 그런 ’왜곡된 인식의 틀’은 이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식을 거듭해서 확대 재생산하고, 폐쇄적 삶과 경직되고 천박한 사고의 틀을 아예 제도적으로 고착시키면서, 장애인을 비롯한 이 사회의 차별 받는 자 모두의 삶을 사회의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하기야 인류역사 자체가 그러한 ’편견과의 투쟁’이었다고 단정지어도 결코 무리가 없을 지경이다. 그것은 편견을 만드는 자와 그렇게 만들어 진 편견을 부수려는 자 사이의 피나는 기나긴 싸움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미개인과 이방인에 대한 몰이해에서의 각성, 노예제도나 계급주의의 타파, 미신적 자연관에서의 해방, 우주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생태계에 대한 정복주의적인 태도로부터 환경친화적인 인식에로의 전이, 절대권력과 독재로부터 민주화로의 이행 등등을 보라. 거기엔 편견과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려는 인간대중의 필사적 몸부림이 절절하고도 처절히 배여 있는 것이다.

  나는 진정 프로크루스테스에게서 ’자 침대’를 빼앗아 버린 테세우스가 되고 싶다. 인간마다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 주면서 그 나름 자기만의 꽃을 활짝 피어나게 해줌으로써, 프로크루스테스적 공포와 그에 따르는 불안이 지배하는 불건전하고도 병들은 이 사회의 비정상적인 분위기를 확 바꾸어 주고 싶은 것이다.

  진정 우리 사회가 인간답게 되려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끝없이 돌고 도는 달리기에서처럼 누구일지라도 모두 거기에 함께 참가할 수 있고, 참가한 누구에게나 달콤한 똑같이 사탕이 선물로 주어져 승자도 패자도 없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그런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장애인들의 장애부터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왜냐면 치료나 재활훈련으로 모든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름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듯, 장애를 하나의 ’다름’ 곧 ’개성(個性)’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시대를 맞아 획일적인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다름’의 고유한 삶으로 받아들여 주는 깨어 있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겐 더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공동체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혼자 살기’는 ’혼자 죽기’일 따름이다. 따라서 인간 삶의 공동체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의 당위성은 아주 현실적인 데 근거를 두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적 삶의 연대망을 우리 사회에다 구축하면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전체성을 회복시킬 때, 장애인 복지는 이 사회를 선진화로 이끄는 방향성 그 중추적 핵심에 닿는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장애인 복지야말로 ’인류 최후의 복지과제’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다.   

  결국 장애인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인간화를 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네 잎 클로버’가 장애를 가진 잎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고 불리우게 되었듯,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편견과 차별의 문턱을 낮추어 장애인들이 편한 마음으로 사회 속으로 나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성숙됨을 향해 큰 걸음을 성큼 내딛는 아주 가치 있고 의미로운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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