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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2: 붓다의 성도지 부다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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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7 ㅣ No.1808

[김소일 위원의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 (2) 붓다의 성도지 부다가야


광야의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 뿌리친 붓다 그리고 깨달음

 

 

붓다는 6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마하보디 사원의 보리수는 그 후손 나무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 불자들의 순례와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깨달음의 현장 부다가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세례와 함께 시작된다. 서른 살 무렵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그 순간에 성령이 그분께 임했다고 전한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그때부터 예수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 나선다.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가르치고 깨우쳤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붓다는 출가 후 6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 순간 고타마 싯다르타에서 붓다가 된다.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이었다. 불경은 “새벽의 밝은 별이 돋을 때”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날을 성도절(成道節)로 지낸다.

 

- 한국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간 화합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부다가야는 그 깨달음의 현장이다. 거대한 석조 건축물인 마하보디 사원과 무성한 가지를 드리운 보리수가 있다. 보리수 수명은 대체로 1000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붓다의 깨달음을 지켜본 그 보리수는 아닐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는 스리랑카로 이어졌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면서 “아마 3대쯤 되는 후손 나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생사를 넘나든 극단적 고행

 

인도는 위대한 영성의 땅이다. 초월을 향한 저들의 의지는 다양한 종교와 갖가지 기이한 수행법을 낳았다. 일찍부터 수많은 종파와 유파가 꽃을 피웠다. 치열한 수행으로 경지에 오른 영적 스승들이 곳곳에서 독특한 가르침을 편다. 물질과 현실의 가치를 낮게 두고 정신과 수양을 추구한다. 선정과 해탈을 열망하고 영원과 진리를 갈구한다. 이토록 종교적이고 영적인 민족이 또 있을까.

 

붓다 또한 출가 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결국은 고행림으로 불리는 숲 속에서 홀로 수행에 들어갔다. 6년 동안 이어진 이 수행은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하고 극단적인 수행이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깨 한 알과 쌀 한 알씩을 먹었다. 그리하여 몸은 점점 쇠약해져 뼈와 뼈가 서로 맞붙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겼으며 가죽과 살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다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낙타의 다리처럼 내 두 엉덩이도 그와 같았다. 만약 내가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면, 그때 곧 등뼈가 손에 만져지고 또 등을 어루만지면 뱃가죽이 손에 만져졌다.”

 

- 높이 55m인 마하보디 사원.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다.

 

 

붓다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혹은 가시 위에 드러눕기도 하였고, 혹은 널판자나 쇠못 위에 눕기도 하였으며, 혹은 땅에서 멀리 떨어져 새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였고, 두 다리를 위로 올리고 머리를 땅에 두기도 하였으며, 혹은 다리를 꼬고 걸터앉기도 하였고, 혹은 수염과 머리를 길러 아예 깎지 않기도 하였으며, 혹은 햇볕에 노출하고 불로 굽기도 하였고, 혹은 한겨울에 얼음 위에 앉기도 하였고, 혹은 몸을 물속에 담그기도 하였으며, 혹은 잠자코 아무 말 하지 않기도 하였다.”(증일아함경 제23권)

 

 

마침내 도달한 궁극의 깨달음

 

이런 고행을 통해서 붓다는 “끝내 아무 이익이 없었고, 또 그 최상의 거룩한 법도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붓다는 마침내 다른 길을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결국, 고행을 중단하고 체력을 회복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을로 내려가 수자타라는 여인으로부터 유미죽을 공양받는다. 우유와 쌀가루를 끓인 죽이다.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머리와 수염을 깎는다.

 

그때부터 붓다는 고행림을 나와서 유명한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 부드러운 길상초를 깔고 수행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일까. 중중무진(重重無盡) 법계연기(法界緣起)일까. 색즉시공(色卽示空) 공즉시색(空卽示色)일까. 불법의 경지는 높고 심오해서 선뜻 헤아리기 어렵다. 원행 스님은 간단히 요약했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대자유를 얻고, 그러한 공덕으로 지혜와 복덕을 함께 갖추셨다는 의미입니다.”

 

- 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 있는 불상.

 

 

악마의 방해와 유혹

 

세례를 받은 예수는 곧바로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단식한다. 이때 악마가 다가와 세 가지 유혹을 던진다.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세 가지 유혹은 아마도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재물과 권력과 교만을 상징할 것이다.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일갈로 유혹을 물리친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루카 4,1-13)

 

붓다 역시 깨달음을 앞두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받는다. 처음에는 미색을 동원했고, 다음에는 마귀 군대를 보냈다. 그래도 소용없자 천하를 지배할 전륜성왕을 약속했다. 붓다는 설법으로 모두 물리쳤다. 불경은 악마왕 마라를 욕계의 최고 지배자로 묘사한다.

 

결국, 악마나 마귀는 우리 욕망의 분신일지 모른다. 우리가 욕망에 젖어 살 때 악마는 굳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행과 수양으로 드높은 정신세계에 접어들 때쯤 필연적으로 욕망의 저항을 받는다. 수행이 추구하는 신비적 합일이나 큰 깨달음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14일, 인도=김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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