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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신앙 찾기: 기억이 없어진다고 -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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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7 ㅣ No.1057

[영화 속 신앙 찾기] ‘기억’이 없어진다고, ‘살인자의 기억법’

 

 

영화를 보면서 자꾸 ‘소설’과 비교한다. 원작이 있는 영화, 그 원작을 먼저 읽은 영화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원작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렇다. 김영하의 소설이 원작인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설과 영화를 비교한다. ‘이건 이렇게 바꾸었네!’ ‘왜 금강경 얘기는 안 나오지?’ 하며 영화로부터 슬금슬금 물러난다. 차라리 원작을 읽지 않았거나 잊어버렸다면 영화에 훨씬 깊이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자꾸 원작을 떠올리려 애쓴다. 마치 그 ‘기억’이 영화를 보는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 기억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않고, 소설과 영화를 끝없이 비교하며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소설을 다시 한번 읽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을 온전히 기억하는지 끝없이 묻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기억이란 이처럼 때론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을 빼먹든 말든, 인물 설정과 다르든 말든, 결말을 뒤집든 말든 소설의 ‘기억’을 버리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봐야 한다. 그럴수록 악착같이 달라붙은 원작의 기억.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고, 떠올리려 한다고 언제든 아무런 막힘 없이 떠오르지도 않는.

 

 

삶은 기억이다

 

인간에게 기억은 무엇인가? 삶 그 자체이다. 기억이 없으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기억하고, 기억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으며 과거도, 추억도, 역사도 없다. 순간순간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현재 또한 그 순간이 지나면 끝없이 소멸해 버리고

만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은 그것을 불가에서 말하는 ‘공’(空)이라고 했다. 기억이 없다면 말 그대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영생도 어쩌면 ‘기억’일지 모른다. 죽은 이도 ‘기억’ 속에서 살아 있게 하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고, 누군가는 또 나를 기억하며 살아 있게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살아 있는 이들에게 끝없이 기억됨으로써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감동과 스릴 넘치는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감동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던 연쇄 살인마 김병수(설경구)가, 말이 딸이지 불륜을 저질러 죽여 버린 아내가 낳은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은희(설현)의 목숨을 지키려고 온몸을 던지는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이 원천이다. 긴장감은 바로 딸의 목숨을 노리는 민태주(김만길)란 인간 또한 연쇄살인마란 사실과 노인이 된 김병수가 석달 전 치매 판정을 받아 기억이 끊긴다는 사실에서 온다.

 

여기까지는 소설과 같다. 그러나 소설이 연쇄 살인범이란 극단적 인물의 ‘기억’을 잃어 가는 것에 대한 쓸쓸한 회한의 서술이라면, 영화는 딸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그의 애절하고 집념 어린 ‘기억하기’이다. 그 집념 속에 딸이 있다.

 

사람을 무수히 죽인, 심지어 첫 살인의 대상이 아버지였던 인간의 아름다운 생명 지키기와 휴머니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설은 ‘잘못된 기억’으로 말미암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은희는 딸이 아니며, 살아 있는 존재도 아니다. 비록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그때부터 살의가 사라졌고, 치매에 걸려 살인의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그의 말처럼 “손이 기억하고 습관은 오래가서” 25년 만에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고도 모른다고 말이다. 기억 상실이야말로 또 다른 살인의 시작이다.

 

 

기억이 없다고 죄도 없는 건가

 

영화에서 기억 상실은 오히려 살인이 아닌 살인을 막고 딸의 목숨을 구하며 지난날의 살인을 기억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김병수는 ‘기억하기’(녹음과 기록)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잔인하고 거침없었던 범죄를 들추어낸다. 그렇다고 그 기억하기가 참회를 위한 것은 아니다.

 

김병수는 자신의 살인에 대해 당당하다.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살인이 있다고 했다. 술만 취하면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자신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짐승의 눈빛을 가진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내와 아이를 마구 패는 가정 폭력범, 자신의 반지를 삼켰다고 살아 있는 개를 때려죽이고는 배를 가르는 여자, 인신매매까지 마다하지 않는 악랄한 사채업자, 가정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 이들을 그는 ‘존재 이유 없는 쓰레기들’이라면서 서슴없이 죽여 버렸다.

 

정말 그의 말처럼 그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인간쓰레기들인가? 그는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법을 대신해 응징한 것인가? 기억에도 거짓과 과장과 왜곡이 있다. 인간은 때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기억에 자신의 욕망을 덧칠한다. 기억하기 싫은 부분은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이 모두 ‘사실’은 아니다.

 

설령 김병수의 기억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그의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무리 소설의 쾌락을 위한 다분히 정신병적 행위로서의 살인과 달리 영화에서는 그것이 응징적 행위라 하더라도 말이다. 김병수도 물론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에 목매 자살한 누이를 수녀의 모습으로 만나 “나 벌받는 건가?” 하고 물어본다. 그 벌이란 다름 아닌 기억의 상실, 기억의 혼돈이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고, 기억을 잃게 되었다고 연쇄 살인에 대한 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인간 존재 그 자체이고, 그것을 잃는 것이 자신 소멸이라 해서 죄까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악의 존재를 막았다고, 한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고 상쇄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기억 속에서 사라질 죄라고 해도 진정한 참회가 없다면 용서도 없다. 우리가 주님께 기억하는 죄와 함께, ‘이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죄’까지 모두 고해성사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애초에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인간의 기억과 시간에 대한 성찰보다는 가슴 졸이는 사건의 전개에 매달린다. 김병수의 기억 상실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흡인력과 상업적 흥행을 위한 선택일 것이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김병수와 민태주의 대비와 대결 구도, 비록 자신의 핏줄은 아니지만, 딸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알고 “언제나 나는 아빠 편”이라 하는 딸이 갈 곳은 뻔하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상처를 받아 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는 정신 이상자 살인범 민태주에게 납치된 딸을 구하려고 ‘기억’을 붙잡으려 발버둥 치는 아버지를 누가 가로막겠는가? 사투 끝에 딸을 구하고 “너는 나의 딸이 아니니까.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고 하는 아버지를 누가 살인자였다고 해서 비웃겠는가!

 

영화로만 보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평범하고 뻔한 스릴러이다. 운명적인 대결과 아슬아슬한 위기,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 단서가 나오고, 기억이 살아나며, 그래서 해피 엔딩(행복한 결말)이다. 다만 ‘기억을 잃어 가는 아버지, 지난날 연쇄살인범’이란 주인공의 개성 설정과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가 색다를 뿐이다. 이것조차 특별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영화들도 많이 나왔으니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나는 살인자다.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딸을 구한 김병수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한다. 물론 세상은 그에게 죄를 묻고 벌할 수도 없다. 공소 시효가 끝났고, 더구나 치매에 걸려 있기에 말이다.

 

그의 기억을 그가 첫 살인(아버지)을 저지르기 전인 열다섯 살로 돌려놓은 것도, 그가 은희를 누나로 착각하게 만든 것도, 은희가 그에게 그때의 하얀 운동화를 신겨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주연 배우(설경구)가 같은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처럼 그도 처음 ‘순수’의 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영호가 그랬듯,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기억이나 흔적을 지워도, 지나온 시간은 김병수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마지막에 지금까지 김병수에게 벌어진 일들이 진짜인지 기억의 조작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어감으로 “너의 기억을 믿지 마라. 태주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속편을 만들 욕심인지 모르겠다. 영화라고, 가짜라고 제멋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김병수는 영화를 안 본다고 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 이대현 요나 - 영화 평론가로 국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겸임 교수이다. 한국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저서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이대현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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