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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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발칸: 슬로베니아의 자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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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01 ㅣ No.1515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슬로베니아의 자연 속에서



- 블레드에는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섬이 있다. 블레드 호수에 떠있는 이 작은 섬에는 ‘성모승천성당’이 있는데, 이 작고 오래된 성당의 종을 울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섬에 가까워지자 종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도 깊은 종소리였다. 아흔아홉 개라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성당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랑을 이루어 준다’는 종을 치고 있었다. 성당은 작았지만 제단과 강론대 등이 화려한 비잔틴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15세기에 세워진 이 ‘성모승천성당’은 알부이노 성인과 인제누이노 성인이라는 두 주교에게 봉헌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작고 오래된 곳이지만 슬로베니아 젊은이들에게는 결혼식 장소로도 상당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에 있는 작은 성당 얘기다. ‘줄리안 알프스의 눈동자’라고 하는 인근 보히니 호수(Bohinj Lake)가 아름답기로 더 유명하지만 바로 이 성당 덕분에 무수한 관광객이 블레드로 몰린다. 사람들은 플래트나를 타고 호수를 건너 섬에 닿는데, 이 전통적인 나룻배에 오르면 사공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물에 빠지는 걸 각오해야 해서 사공이 장난삼아 무게중심을 바꾸면 모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다.


- 블레드 호수를 지나는 플래트나 뒤로 언덕 위의 블레드 성과 마르티노 성당이 보이고, 줄리안 알프스 산맥의 위용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 이 호수를 오가는 플래트나는 통틀어 스물세 척이다. 발칸의 다른 나라들처럼 슬로베니아도 외세의 지배를 많이 받았는데, 19세기 초에 새 주인이 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 사람들이 호수가 번잡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 딱 스물세 척의 배만 허가한 관습이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 이어지고, 남자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정교회와 이슬람의 세가 큰 발칸 반도에서 크로아티아와 함께 가톨릭 국가로 분류되는 슬로베니아는 경제적 수준이 높고, 1990년대에 발칸을 휩쓸었던 유고 내전의 상흔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더욱이 평화로운 정경 속에 찾아간 곳이 가톨릭 성당이다 보니 마치 고향에 온 듯 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종소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사랑이 청춘남녀만의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가득한 간절한 기원 모두가 ‘사랑'일테니 그 마음 한 자락씩 펼쳐내는 이들의 종소리가 돌아서 나오는 등 뒤로도 댕그랑댕그랑 울려퍼졌다.



- 포스토이나 동굴은 20킬로미터가 넘는 카르스트 동굴로, 공개되는 구간만도 5킬로미터가 넘는다.

 

 

슬로베니아의 멋진 호수를 보고 찾은 곳은 땅속이었다. 사실 ‘동굴’을 본다기에 심드렁했다. 뭐 대수로울 게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토이나 동굴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길이가 20킬로미터가 넘는 이 신비의 동굴은 19세기부터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 기차의 종착역인 너른 광장은 음악당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입장시간이 되자 무수한 사람들이 동굴 안까지 타고 가는 꼬마기차 앞에 섰다. 기차를 타고 들어선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거대한 동굴 속엔 사람들의 탄성이 메아리쳤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장관이 펼쳐졌고, 사람들은 짜릿한 놀이기구를 탄 아이들처럼 놀라움을 마음껏 표현했다. 마침내 그 장관의 한복판에 내렸다.

 

흔히 ‘골고타 언덕’이라고 하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거의 한 시간쯤을 걸었다. 굳이 안내자의 설명이 없어도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넘쳐날 풍경이었다. 수백수천의 성상이 있고 수백수천의 기둥이 서있는 장엄한 공간, 마치 예배를 위한 장소 같았다.

‘러시안 브리지’를 지나고 석회 성분이 든 물방울이 천장에서 석순으로 떨어지는 ‘시간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동굴’을 지나고, 종유석이 하얀 국수처럼 매달린 ‘스파게티 홀’과 파이프 오르간과 아이스크림 모양의 종유석 등을 지났다. 때론 기괴하고 때론 신기해했으며 때론 아름다웠다. 지루할 틈 없이 걷다보니 마침내 허락된 길의 끝에 다다랐다. 공간이 훌륭한 공명을 가능하게 해서 실제로 연주회도 열리곤 한다는 널따란 광장을 뒤로 하고, 다시 꼬마기차를 타고 출구를 향해 달렸다. 기차에서 내려 나가는 길에는 어둠 속에 거센 물소리가 들렸다. 동굴 지하로 흐르는 피비카 강의 거침없는 흐름을 따라 지상으로 돌아왔다.


- 1882년 착공해 아직도 건축이 계속되고 있는 바르셀로나 ‘성가정성당’의 ‘탄생의 파사다’


낮은 기압 때문인지 동굴의 음습함 때문인지 일행은 꽤 지쳐보였다. 하지만 난 예상치 못한 선물을 한 보따리 받은 아이처럼 아주 많이 즐거웠다. 동굴에서 나와 밥을 먹을 즈음에야 어디선가 본 것만 같던 동굴 안 풍경들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랐다. 난 동굴 안에서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와 알람브라 궁전의 천장 장식을 보았던 것이다!

 

가우디는 ‘성가정성당’(바르셀로나)의 독특한 양식을 자신이 태어나 자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톱니 모양 산’ 몬세라트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는 “인간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거나, 이미 발견된 것에서 출발할 뿐이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고 자연의 법칙을 찾는 사람은 창조주와 연합한다.”고 밝혔다.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의 ‘사자의 궁’ 안에 있는 기둥들과 왕비의 방 천장 문양은 말 그대로 종유석을 닮았다. 이슬람의 기하학적 문양은 정교한 수학적 계산에 따른 것이겠지만, 문외한의 눈으로 보면 동굴 속 제멋대로 솟아난 종유석의 모양이나 진배없이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 문외한의 눈으로 볼 때,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 안 ‘사자의 궁’ 안에 있는 왕비의 방 천장 문양은 쏟아질 것 같던 포스토이나 동굴의 기기묘묘한 종유석들과 참 닮았다.


코헬렛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1,13-14 참조)고 탄식하며 하루를 노래했지만 난 어마어마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동굴 앞에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음을 확인하며 끝없이 겸손해야 할 사람의 자세를 생각했다.

슬로베니아의 자연은 창조주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을 상기시켰다. 그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 나의 의무라는 것도 환기시켰다.

모처럼 발칸에서 힘겹고 곤고한 현실이나 날선 정치를 잊고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자니 참 평안하고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람들 또한 조금씩 평화를 찾고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9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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