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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 (9) 십자가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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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3 ㅣ No.191

[가톨릭 문화산책] <4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 (9) 십자가 처형


피로 얼룩진 얼굴, 못박혀 비틀어진 손발...어린양 위해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사도 2,28)

작품 : 마티스 그뤼네발트 작 '십자가 처형' (이젠하임 제대화 일부, 269×307㎝, 1512~16년, 목판에 유채, 프랑스 알자스 주 콜마르 운터린덴 미술관)

● 고통의 신비 5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십자가, 생명, 사랑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한 그림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 작품이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께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심,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하면서였다. 많은 화가가 예수의 죽음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고통을 초월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의 모습부터 예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한 그림까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다룬 그림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요한 사도가 배치되곤 한다.

화가 마티스 그뤼네발트(1470?~1528년)는 알사스 지방의 이젠하임에 있는 안토니오 수도회 의뢰로 수도원 소속 병원을 위해 '이젠하임 제대화'를 제작했다. 병자들을 간호하는 사도직 활동을 했던 수도회는 그림을 통해 질병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병자들에게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제대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그래서 제대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진 고통을 극복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듯이 환자들 역시 병마의 고통을 이겨내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림 '십자가 처형'은 '이젠하임 제대화'의 중앙 패널의 일부다. 그림 중앙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 혼비백산한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를 부축하는 요한 사도, 무릎을 꿇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다. 오른쪽에는 요한 세례자가 서 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병사들이 죄목으로 '유다인의 왕 예수'를 나타내는 라틴어 약자 'IㆍNㆍRㆍ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가 적혀 있다.


사랑의 징표 :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
 
황량한 골고타 언덕에서 이뤄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비참한 슬픔으로 재현돼 있다. 예수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끔찍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말라 비틀린 팔과 다리, 머리 깊숙이 박힌 가시관으로 피로 얼룩진 얼굴, 못에 박혀 비틀린 두 손의 손가락들, 선연한 채찍 자국, 몸의 무게로 찢어질 듯한 겨드랑이, 가시 박힌 몸의 표현 등은 예수가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을 보다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에 몸을 비틀다 예수는 막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뤼네발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통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림의 전체 구성에서 예수는 다른 주변 인물보다 더 크게 묘사돼 수난의 육체적 고통이 두드러진 '사람의 아들'로 나타난다.
 
동시에 화가는 예수의 인체를 고통의 흔적과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해부학적 조형성에 맞춰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육체적 이상미는 경외감과 장엄함을 불러일으켜 예수의 신성을 느끼게 한다.

화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다. 화가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예수의 사랑을 표현한다. 예수의 손발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인류에게 흐르는 사랑의 표징이다. 마치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던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듯이"(창세 2,6-7)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와(요한 19,34) 세상 모든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의 표징과도 같은 예수의 피와 물을 내어주신다.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다"(요한 7,38-39).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두운 하늘에 황폐한 돌투성이 바닥에 박힌 커다란 십자가 위에 처참하게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요한 3,16).
 

한없는 슬픔 :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크나큰 슬픔에 젖어 있다. 흰색 옷이 눈에 띄는 성모 마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모습에 넋을 잃은 듯 몸을 가누지 못한다. 비통한 표정의 요한 사도가 성모 마리아를 부축한다. 그림 전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성모 마리아의 흰옷은 순결한 여인의 상징으로,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듯 예수의 몸에 흐르는 피땀과 대조를 보인다. 찢긴 아들의 몸을 바라보는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찬 절규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다. 또한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예수를 바라보며 비탄에 빠져 있다. 예수의 발치에 있는 것은 향유가 담긴 옥합으로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고 회개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상징물이다.


구원과 희생 : 요한 세례자와 어린 양
 
이 작품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등장하는 인물, 곧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외에 요한 세례자가 나타난다. 성경에 따르면, 요한 세례자는 예수가 못 박히기 전에 벌써 살로메와 헤로데에게 처형당했다. 요한 세례자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에게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줌으로써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뤼네발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요한 세례자를 왜 등장시킨 것일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비통해하는 모습과는 달리 요한 세례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표정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검지를 들어 예수를, 엄지는 그의 발아래에 어린양을 가리키고 있다. 요한 세례자의 팔 윗부분 배경에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성구가 쓰여 있다. 예수가 구세주로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며,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도록 인도한다. 요한 세례자의 등장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작에 피를 쏟는 어린양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희생으로 한 몸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요한 세례자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가 하느님께 피의 제물로 바쳐진 구세주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예수는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어린양이다.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물은 인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평화신문, 2013년 11월 24일,
윤인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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