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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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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21 ㅣ No.588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

 

 

지난 9월 28일 의정부교구장 이한택 주교님의 주례로 마재성지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의정부교구가 개발한 첫 성지로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16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크게 만나는 한강변에 안겨있는 마을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 순교자와 그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초기 신앙선조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입니다.

 

 

“주교요지”를 쓴 명도회 회장 정약종

 

정약종은 1786년 3월에 형인 정약전에게 교리를 들었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순교할 때까지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초기 교회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총회장 최창현은 정약종을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사영 백서에 보면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고 몽매한 이를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주기를 혀가 굳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싫증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습니다.”(36행) 하였습니다.

 

그가 양반 지식층이 아닌 한글만을 알고 있던 일반인을 독자층으로 하여 쓴 “주교요지”는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이 책을 통하여 전한 하느님의 뜻은 희망에 가득 찬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1800년 여름에 고향을 떠나 배를 타고 서울로 가서 관훈동의 청석골 오른편에 있던 문영인 비비안나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이에 정약용이 남문 밖에 집을 사서 이주토록 하였습니다.

 

정약종은 1801년 2월 체포되었고, 그달 12일 신문과정에서 “저는 본래부터 이것이 정학(正學)이라고 알고 있었을 뿐 사학(邪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만일 사학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어찌 감히 이를 배웠겠습니까? 그것은 대단히 공정하고 지극히 진실한 도리이므로, 몇 년 전에 나라에서 이를 금한 이후에도 애초부터 바꿀 마음이 없었습니다. 비록 만 번 죽음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뉘우칠 마음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주문모 신부와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서양과 중국에는 모두 신부님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습니다. 비록 진실로 학문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죽게 되면 혼자 죽을 따름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겠습니까! 삶을 바라고 죽음을 꺼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의를 배반하고 사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천주는 곧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이시니,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천지의 죄인으로,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동료들을 지목하여 고하라고 하지만, 조정에서 정도를 행하는 현인으로 인정하여 관직을 주고 상을 준다면 가리켜 고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번번이 형벌을 가하니 어찌 고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정약종은 체포되지 않은 신부님과 신자들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한 번 칼에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도 벌떡 일어나 팔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긋고는 조용히 다시 엎드려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2002년 1월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이달의 문화인물’로 뽑혔고, 같은 달에 한국사상사학회 주최로 ‘정약종의 시대와 사상’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때 ‘정약종과 초기 천주교회’(조광), ‘정약종 가문의 천주교 신앙실천’(주명준), ‘정약종과 유학사상’(송석준), ‘정약종의 신학사상’(한건), ‘정약종의 “주교요지”와 한문서학서의 비교연구’(원재연),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서종태)<“한국사상사학” 18집, 한국사상사학회, 2002>가 발표되었습니다.

 

 

아버지 정약종의 뒤를 따라 순교한 정철상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1801년)는 지난 호에 소개한 포천에 살던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스무 살쯤 되었을 때에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부친이 감옥에 갇히자 관습대로 부친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관리한테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대라는 명을 받았지만 거부하였고, 친척 어른에게 송곳으로 발목뼈를 뚫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부친이 순교한 뒤 형조로 소환되어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하느님을 위해 죽은 부친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내었고, 마침내 참수되어 4월 2일 순교하였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을 맞이합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늦게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불타는 열정으로 오롯이 신앙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널리 전하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닮고자 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 두 분 순교자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이어받았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08년 12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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