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일본천주교회 새 복자 188위 순교사 (하) 혼슈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14 ㅣ No.587

일본천주교회 새 복자 188위 순교사 (하) 혼슈편


교토의 하시모토, 임신한 부인 자녀 5명과 함께 순교

 

 

나고야시 나미야코미술관 소장작 '운젠(雲仙) 순교자들'. 왼쪽 상단 성모 마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운젠다케(雲仙岳)로 끌려가는 순교자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제공=일본 가톨릭신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선 단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

 

1639년 7월 복자 키베(岐部, 베드로, 예수회) 신부는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며 이같은 유언을 남긴다. 동료 순교자 187위도 '하느님의 때'(kairos)를 기다리며 순교로 사랑의 증거를 드러내는 한 생애를 살았다. 이 올곧은 영성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키베 신부, 순교자들을 현대 일본천주교회와 이어준다.

 

혼슈(本州) 또한 큐슈(九州)와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체제가 들어서며 피바람 속에 17세기를 맞는다. 동북 야마가타(山形)현에서 서남 야마구치(山口)현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 유해로 뒤덮였다. 센고쿠(戰國)시대 때 일본 열도에 복음의 씨앗을 퍼뜨린 선교사들은 추방되고, 가톨릭 공동체는 사실상 와해됐다. 11월 24일 복자위에 오른 188위 가운데 혼슈 일대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13위에 이른다. 이번 호에선 혼슈 일대에서 순교로 복음을 증거한 새 복자들을 살핀다.

 

 

'모퉁이의 머릿돌' 된 요네자와 순교자들

 

일본 교회 선교는 '위로부터' 이뤄졌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는 일왕과 전국 각지에 할거한 센고쿠 다이묘(戰國 大名)들을 보호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이 선교 전략은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일왕은 너무도 무력했고, 쇼군(將軍)조차도 교토(京都) 일원에만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일부 중소 센고쿠 다이묘 가운데 자신의 영내에서 선교를 허용, 일종의 기리시탄(切支丹, 그리스도인) 영지가 형성된다.

 

가모오 우지사토는 기리시탄 다이묘였다. 그가 혼슈 동북부 토오후쿠(東北)에 진입한 것은 1590년으로, 이 때 토오후쿠에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해진다.

 

1611년 센다이(仙臺)에 파견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 신부는 잠시 짬을 내 야마가타현 남부 요네자와(米澤)에 들러 작은 공동체를 만든다. 이 공동체가 이번에 시복된 188위 중 가장 많은 53위 복자를 낸 요네자와 공소다. 아마카수 우에몬(루이스)과 두 아들 아마카수 타에몬(미카엘), 쿠로가네 이치뵤오에(빈첸시오)가 봉사역을 맡은 이 공동체는 훗날 신자만 3000명이 넘는 공동체로 자라났지만, 1629년 1월에 일어난 박해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목이 잘린 신자는 남자 30위, 여자 23위 등 53위에 이르렀고, 이 중 5살 이하 유아가 9위나 됐다. 이로써 요네자와공소 공동체는 일본 교회 '모퉁이의 머릿돌'(마태 21,42)이 됐다.

 

 

전국 박해 시발이 된 교토 52위 순교

 

당시 일본 수도 교토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1576년 8월 15일이다. 예수회 오르간티노 신부에 의해 세워져 수도 교회의 초석이 된 성모승천성당이다. 3층 규모 일본풍으로 지어진 성당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기교를 부려 예쁘게 지은 교회건축이었다. 여기에서 일본 첫 여자수도회가 1602년에 태어난다.

 

그러나 1614년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선교사와 수녀들은 마닐라와 마카오로 추방되고 하급 무사들과 이름없는 서민들, 지방 출신 가난한 신자들만 남아 신앙을 지켰다.

 

하지만 1619년 초 추방에도 불구하고 교토에 가톨릭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옥중에 갇힌 신자들과 석방한 신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교토 카모카에(鴨川)에서 화형에 처한다. 이들이 하시모토 타효오에(요한)와 임신한 부인 테클라, 자녀 5명을 비롯한 52명이었다. 남자가 26명, 여자가 26명으로, 15살 이하 어린이도 11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당시 순교 장면이 눈물겹다. 세 살배기 루이사를 끌어 안은 어머니 테클라는 밧줄에 묶여 십자가에 달렸고, 그 곁엔 열두 살 토마스와 여덟 살 프란치스코, 열세 살 가타리나, 여섯 살 베드로가 매달렸다. 이윽고 불이 붙여지자 불꽃과 연기 안에서 가타리나가 "어머니, 아무것도 안 보여요"하고 외치자, 어머니는 "괜찮다. 곧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우린 모두 다시 만날 것이다"고 답변하며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숨졌다. 숨이 끊어진 뒤에도 어머니는 딸을 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전국 다이묘들은 새삼 가톨릭교회에 대한 막부의 진의를 알게 됐고 박해는 날이 갈수록 극심해졌다.

 

 

일본 복음화의 꿈을 안고 순교한 키베 신부

 

이번에 복자품을 받은 일본인 사제 키베 신부의 이력은 독특하다. 열세 살 되던 1600년 나가사키(長崎)현 아리마(有馬)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1607년 졸업 직후 예수회 입회를 희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스스로 쓴 서원문을 주머니에 넣고 때를 기다린 그는 후쿠오카(福岡)현에서 8년간 일하며 사제직을 희망하다가 1614년 마카오로 향한다.

 

그러나 마카오에서도 사제의 꿈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1617년 마카오를 출발, 인도와 파키스탄, 이라크, 요르단, 예루살렘을 거쳐 1620년이 돼서야 로마에 도착해 예수회 본부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해에 그는 사제품을 받고 5일 뒤 예수회에 입회한다.

 

1622년 3월 12일 행해진 이냐시오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시성식에 참석한 그는 새삼 하비에르의 선교 열정을 떠올린다. 이에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1630년 일본으로 돌아온다. 16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나가사키는 이미 박해로 뒤덮여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 예수회 책임자 크리스트반 페레이라가 배교한 터여서 그는 교토를 거쳐 토오호쿠 지역 미즈자와(水澤)에 활동 거점을 마련해 선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1638년 전국적 박해가 다시 시작되면서 키베 신부도 체포되기에 이르른다. 에도(江戶)에 호송된 그는 쇼군 이에미쯔와 중신들 앞에서 문초를 당하고 순교했다. 그 때가 1639년 7월이었다.

 

 

'피로 얼룩진 박해'는 전국으로 번지고

 

박해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강직하고 열성적 사제로 유명했던 유우키 료오세쯔(디에고, 예수회) 신부는 1636년 시코쿠(四國) 산중에서 체포돼 그해 2월 말 오오사카(大坂)에서 순교의 관을 쓰게 됨으로써 하느님께 사로잡힌 자의 표지가 된다.

 

히로시마(廣島)교구 관할 지역에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라 산 작은형제회 제3회원 토오야마 진타로오(프란치스코), 옥지기인 쇼오바라 이치자에몬(마티아스), 오랫동안 전교의 삶을 산 쿠로오에몬(요아킴)이 1624년 2월과 3월 사이 히로시마에서 참수되거나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

 

또 야마구치(山口) 현에선 부젠 타카마쯔(豊前高松) 성주이자 모오리 가문 중신으로 사제가 없는 야마구치공동체의 보호자이던 쿠마가이 부젠노카미 모토나오(멜키올)가 1605년 8월 16일 순교의 관을 썼다. 이어 이름을 알 수 없고 세례명만 전해지는 맹인 선교사 다미안이 붙잡혀 사흘 뒤 순교했다. 이들의 순교는 후일 야마구치교회의 빛이 됐다.

 

이처럼 이어진 일본 순교자는 300여 년간 2만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이들이 일본 교회에 남긴 복음과 신앙, 생명의 빛은 그로 인해 더욱 빛났다.

 

[평화신문, 2008년 12월 14일, 오세택 기자]



65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