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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68: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영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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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8 ㅣ No.844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8)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영성 ①


‘침묵’으로 하느님 영광을 노래하다

 

 

복녀 엘리사벳의 영성 : 영광의 찬미

 

영성은 하느님께 대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사랑의 색깔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독특함과 고유한 삶의 자리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맺는 나만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복녀 엘리사벳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지녔던 그만의 고유한 색깔, 영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의 찬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찬미’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르멜 수도회의 영성적인 전통에서 ‘침묵’은 가장 중요한 환경적인 요소입니다. ‘영광의 찬미’, 즉 하느님을 찬미하며 일생을 살고자 했던 복녀 엘리사벳의 영성 세계에 있어서도 ‘침묵’은 영성의 바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찬미가’라고 하면 일종의 소리이고 노래인데, 어떻게 그 반대인 침묵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복녀는 침묵을 참 사랑했습니다. 침묵이야말로 그가 하느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게 해주는 중요한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수녀님이 엘리사벳에게 가르멜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가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엘리사벳은 서슴없이 ‘침묵’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주의 모든 음을 담아내는 침묵

 

그런데 복녀 엘리사벳의 영성에 있어서 특징으로 저는 ‘침묵’과 더불어 ‘음악적 감수성’을 들고 싶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숫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주를 ‘숫자’로 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주 전체가 이루는 아름다운 조화를 음악적으로 풀어내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을 숫자로 풀어내려고 했던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자신이 살던 마을의 길을 지나갈 때면 대장간에서 거칠게 쇠를 두들기는 소음을 듣곤 했답니다.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찢어질 듯한 소리죠.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그 소리가 아주 조화롭게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들어가 곰곰이 알아봤더니, 기다란 쇠봉이 있고, 그 쇠봉의 삼 분의 이 되는 길이의 쇠봉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것보다 더 작은 삼 분의 이 길이의 쇠봉들을 더 만들어서 두들겼더니 일정한 음계를 이루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음악의 기본이 되는 8음계였습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소리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위해서 지원자들에게 요구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지원자들은 5년 동안 침묵 수행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음악의 모든 음을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침묵이라고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침묵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아름다운 음을 담아내는 근본 바탕입니다. 복녀 엘리사벳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침묵을 사랑했던 엘리사벳

 

그래서 지극히 예민한 예술적 감수성을 가진, 그래서 음의 아름다움, 소리의 아름다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복녀 엘리사벳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영성적인 차원에서 ‘침묵’이 근본적인 바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복녀는 어린 시절부터 ‘침묵’을 많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부산한 상태, 외적인 소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린 시절 파리 국제 박람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박람회가 보여준 온갖 화려함과 소란스러움을 들으면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녀 엘리사벳이 지향했던 침묵은 단순히 외적인 소음으로부터 피해서 조용한 환경에 자신을 둠으로써 자신을 거둬들이는 수동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기 표현의 형태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복녀가 디종 수녀원에 살 당시, 어느 해인가는 복녀의 옆방에 어느 수녀님이 사셨는데 상당히 민감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건강도 많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 수녀님은 조금만 자기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나 아주 작은 소음이라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평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많은 수녀님이 그 수녀님의 예민함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나 복녀 엘리사벳은 그 옆방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침묵을 살았습니다. 그 침묵은 바로 형제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내적 침묵과 영광의 찬미가

 

또한 이러한 복녀의 침묵은 내적인 침묵으로 이어졌는데, 이 내적 침묵은 복녀의 영성이 표방한 모토인 ‘하느님께 영광의 찬미’를 드리는 것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복녀 엘리사벳이 지향한 성성의 색깔은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음을 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영원히 부르는 영혼이 되겠다는 게 엘리사벳이 살아생전에 그토록 원했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상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복녀가 지향했던 방법은 다름 아닌 ‘침묵’이었습니다. 그래서 복녀 엘리사벳이 스스로의 소명이라고 본 ‘영광의 찬미’와 ‘침묵’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복녀는 모든 내면의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하고 조율하면서 영혼 깊이 내려가 침묵에 잠길 때 비로소 영혼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9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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