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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복음의 기쁨을 사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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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8 ㅣ No.1216

[경향 돋보기 -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복음의 기쁨을 사는 교회



쁨이 없는 교회

많은 이가 그렇듯이 저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문 「복음의 기쁨」을 읽어가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분석하면서 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지, 마치 한국 천주교회만을 대상으로 쓴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교황이 문헌의 제목을 ‘복음의 기쁨’으로 정한 이유는 바로 기쁨이 없는 교회의 현실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 가정과 일터에서, 또 신앙인으로서 사도직 현장과 영적인 체험에서 오는 크고 작은 기쁨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인의 일반적인 모습은 마치 “부활시기 없이 사순시기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으로 교황은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신앙인들이 피상적인 쾌락은 증대시킬지라도 참된 기쁨과는 거리가 먼 극심한 소비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적 생활마저도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있는 개인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치유하는 일은 ‘복음의 기쁨’을 회복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교황이 강조하는 ‘복음의 기쁨’은, 먼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에서 오는 ‘구원의 기쁨’이고, 또한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체험하는 ‘복음화의 기쁨’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에서 오는 구원의 기쁨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곧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살아계시며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의 체험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만남이,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에만 가능한 것처럼 축소해서 이해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는 우리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적인 노력이지만, 만일 그것이 전부라면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백이 바로 이 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은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직업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다하면서도 너그럽고 단순하며 믿는 마음을 지닌 이들의 진정한 기쁨을 떠올립니다. 이 모든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흘러나옵니다”(「복음의 기쁨」, 7항).

그래서 교황은 육신 없이 순전히 영적인 차원에서만 하느님과 관계 맺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방해한다고 지적하면서, 전통적으로 수덕생활에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졌던 용어를 과감하게 사용합니다. “여기에 바로 참다운 치유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그 길,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참으로 치유해 주는 그 길이 바로 신비적 형제애, 관상적 형제애이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92항).

사실 성경 말씀을 온전히 알아듣는 일 역시 개인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강조한 것처럼, “성경은 하느님 백성에 의하여,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과의 이러한 친교 안에서만 우리는 참으로 ‘우리’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리의 핵심 속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주님의 말씀」, 30항). 그러므로 개별적으로만 하느님을 만나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공동체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려는 이들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신앙의 터전입니다.


복음화의 기쁨

‘복음화’라는 용어가 우리 교회 안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정작 본당 사목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면 아직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화는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활동의 전부로 여기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복음의 가치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일이 소홀히 되고, 또 선교를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로만 여기거나 또는 직접적인 책임을 맡은 소수의 일로만 여기던 인식을 교정하고자 등장한 용어입니다. 그래서 복음화는 교회가 수행하는 다음의 세 가지 활동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신앙인으로서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목활동과 신앙의 열성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새로운 복음화, 또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선포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쪽의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다른 분야 역시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음화는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그 요소들은 인류의 쇄신, 증거, 명시적 선포, 마음의 귀의, 공동체 소속, 성사 배령, 사도직 활동 등이며, 이 모든 요소는 서로 상충되고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호보완적이고 서로를 풍요롭게 해줍니다”(「현대의 복음 선교」, 24항).

구원의 역사 전체는 온 세상의 복음화를 향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불러모으시려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를 부르시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려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그 일이 바로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따라서 교회가 수행하는 모든 일은 어떤 식으로든 복음을 전하는 일과 관련되어야 하고, 그럴 때 교회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는 선교 명령의 문맥을 살펴보면, 세상 모든 사람을 불러모으시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견 명령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제자들의 내적 상태에 대한 놀라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의심하던 제자들과 지금 우리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분을 섬기고는 있지만, 우리의 내면은 적지 않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선교 명령을 내리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의 맨 마지막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그러므로 선교활동은 신앙인의 내면에 가득한 의심을 극복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확실하게 만나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과연 사도행전은 믿음이 약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면서 용감한 사도로 변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 견고해집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2항). 비록 믿음이 약하더라도 복음화 활동에 뛰어들어야 복음의 기쁨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화를 위한 구조 전환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을 사는 교회를 만들려면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며, 사목 일꾼들에게 ‘출발’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도록, “본당 사목구는 공동체들의 공동체이고, 길을 가다가 목마른 이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지성소이며, 지속적인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7. 28항).

이러한 구조적 쇄신의 핵심에 신앙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본당이라도 모두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큽니다. 모든 신앙인이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면서 복음화를 수행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교황은 본당 내의 기초공동체와 소공동체들을 복음화를 위해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신 교회의 풍요로움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금으로서는 우리나라의 여러 본당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소공동체 사목이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적인 세속성’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피정을 다니면서도 자칫 휩싸일 수 있는 개인주의적인 ‘신영지주의’의 위험과, 때로는 내적 노력은 소홀히 한 채 봉사에만 몰두하다가 빠질 수 있는, 자신의 업적이나 결과만을 중시하는 ‘신펠라기우스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소공동체에서는 성경공부와 공동체의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매주 모여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형제들의 묵상을 통해 들려지는 성령의 음성은, 자기 방식으로만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는 쉽지 않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합니다.

둘째, 회개의 공동체를 건설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구역이나 반의 모임을 통해서는, 비록 복음나누기를 하고 있더라도 의무감에 쫓겨 형식적으로 참여하다보니, 복음적 공동체를 만드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공동체란 성령의 도움으로 회개하고 마음이 열려 서로를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만 비로소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매주 만나는 가운데 말씀나누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고해성사 수준으로 자신을 열어 보이게 되고, 하느님께서만 허락하시는 영적인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진솔한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식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음의 기쁨은 확산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에, 지역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으로 이어져 ‘복음화의 기쁨’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생명은 내어줌으로써 더 자라나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제쳐두고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복음의 기쁨」, 10항). 복음화에 대한 관심은 이웃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이나,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소해 주는 데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복음의 기쁨」, 9항). 그렇게 증거하는 복음의 매력이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열어 신앙의 초대에 응답하게 합니다.

소공동체 사목에서는 「함께하는 여정」이라는 예비신자 교리서를 통해서, 교우들이 예비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직접 수행하도록 장려합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말씀을 중심으로 공동체 안에서 예비신자들을 양성하게 되고,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냉담자가 되는 일이 줄어듭니다. 또한 양성을 담당하는 기존 신앙인들을 성숙하게 만들어, 공동체의 존재 이유가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지니게 도와줍니다.

넷째, 전례가 활성화됩니다. 전례의 활성화는 성가나 독서 연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탕이 되어야 전례 안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6개월 동안 말씀나누기에 참가했던 어떤 할머니의 증언만 들어도 분명해집니다. “이제 신부님의 강론이 들려요.”

또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을 바탕으로 거행되는 성찬례는, 모든 구성원이 예수님의 몸을 같이 나누는 한 형제요 식구임을 느끼게 만들고, 예수님의 제자들끼리만 느꼈던 참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성전 안에서 거행되는 전례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일흔 두 제자가 활동을 마치고 돌아가보고 했을 때처럼(루카 10,17-20 참조), 참다운 복음의 기쁨이 교회 공동체 안에 넘쳐 흐를 것입니다.

* 김광태 야고보 - 전주교구 신부. 교구 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김광태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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