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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일본천주교회 새 복자 188위 순교사 (상) 큐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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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14 ㅣ No.585

일본천주교회 새 복자 188위 순교사 (상) 큐슈 편


1603년 12월 구마모토에서 젊은 무사 첫 순교

 

 

압도적 소수인 일본 천주교회에 복자 188위 탄생은 '영광 중 영광'이다. 총 인구 1억2777만8000명 가운데 53만3000명으로, 0.417%에 불과해서다. 그럼에도 300년 가까운 박해로 2만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냈고, 이 가운데 성인은 42위, 복자는 393위에 이른다. 특히 이들 복자 가운데 188위는 11월 24일 나가사키에서 시복됐다. 이를 계기로 일본 교회 새 복자 188위 순교사와 그 역사적 배경을 돌아본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첫 순교지 '야쯔시로'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는 '일본 복음화의 분기점'이다.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잔존 세력인 이시다 미쓰나리측에 가담한 큐슈(九州) 구마모토(熊本)현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는 패전해 교토(京都) 로쿠조오 강변에서 목이 잘린다. 이로써 1603년부터 1868년까지 무려 266년 동안 이어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체제 아래 기나긴 박해가 막을 올린다.

 

공식적으로 금교령이 선포돼 전국적 박해가 일어나는 시기는 1614년이다. 당시 일본 천주교회 교세는 무려 37만 명에 이르렀다. 지금과 비교해도 16만 명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융성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첫 순교자가 발생한 것은 그에 앞서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다. 한때 신앙을 버렸지만 죄를 뉘우치며 다시 신앙을 되찾은 큐슈 야쯔시로(八代)지역 젊은 무사인 미나미 고로오자에몬(요한)은 1603년 12월 구마모토에서 참수됐다. 이어 야쯔시로 성 밑에서 다케다 고효오에(시몬)의 목이 잘렸고, 그의 어머니 요한나와 처 아녜스, 미나미의 처 막달레나와 그의 양자인 7살 루도비코가 십자가 형을 받았다. 최후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며 창을 받은 어머니 요한나의 유해는 썩을 때까지 방치됐다. 그 유골은 훗날 와타나베 지오로자에몬(요아킴) 등이 수습, 아리마(有馬)와 나가사키(長崎)로 보내지만 이들 역시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와타나베는 1606년 옥중에서 병사했고, 그를 도운 미쯔이시 히코에몬(미카엘)과 핫토리 진고로오(요한)는 1609년 목이 베어졌다. 이 때 그들의 아들 13살 미쯔이시(토마스)와 5살 핫토리(베드로)도 처형됐다. 두 부자의 유해는 추방된 선교사에 의해 마카오로 옮겨졌으나, 1995년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면서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야쯔시로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사쯔마(薩摩)에서는 사이쇼 시치에몬(레오)이 이번에 복자가 됐다. 젊은 무사였던 그는 세례받은 지 4개월도 채 안 돼 1608년 11월에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며 순교함으로써 성 도미니코 성당의 초석이 됐다.

 

또 고쿠라(小倉)에서는 참신앙인으로서 아버지의 모범을 보인 카가야마 하야토(디에고) 등이 1619년 순교했고, 오오이타(大分)와 구마모토에선 그의 자녀와 사위가 1636년 순교의 길을 걸었다. 후쿠오카(福岡)ㆍ오오이타(大分)교구는 이같이 이번에 복자를 30위나 냈다.

 


복음의 씨앗을 품고 퍼뜨린 '나가사키'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1614년 11월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대부분 추방됐지만, 일본에 남아 계속 잠복활동을 하던 선교사도 꽤 됐다. 예수회원 26명을 비롯해 작은형제회원 6명, 도미니코회원 7명, 아우구스티노회원 1명, 일본인 교구 사제 5명 등 45명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 케이안(니콜라오, 예수회) 수사도 잠복해 활동하던 수도자로, 1633년에 잡혀 나가사키에서 순교한다.

 

나가사키(長崎)교구에선 그를 포함해 이번에 복자를 44위나 냈다. 니이가타(米澤)교구 53위, 교토(京都)교구 52위에 이어 세 번째 규모다. 26위 성인 기념성당이 세워진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언덕에서 4위, 히라도(平戶) 이키쯔키(生月) 섬에서 3위, 시마바라(島原)반도 운젠다케(雲仙岳)에서 29위, 아리마(有馬)에서 8위 등이다.

 

11월 22일 일본 천주교회 성인 26위 및 새로 복자위에 오른 4위 순교터에서 한국교회 순례단 일원으로 참가한 두 신자가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있다.

 

 

니시자카에서 순교한 주인공은 쿠수리야(미카엘)ㆍ케이안 수사ㆍ나카무라(줄리앙)ㆍ킨쯔바(토마스) 등이다. 1618년부터 미제리코르디아(慈善組) 회장으로 일하면서 순교자 미망인과 고아, 선교사를 돕던 쿠수리야는 잠복교회(일종의 지하교회) 주역으로 활동했지만, 1633년 7월 케이안 수사와 함께 순교했다.

 

1987년 시성된 성 니시(토마스, 1634년 순교)의 아버지 니시 겐카(가스팔)와 어머니 우르슬라, 장남 니시 마타이치(요한) 등 3위도 1609년 11월 히라도 이키쯔키 섬에서 참수를 당했고 이번에 시복의 영광을 누렸다. 이로써 이들 가족은 '일본천주교회 가정의 모범'이 됐다.

 

지금은 아름다운 휴양지가 됐지만 시마바라반도 운젠다케는 순교의 산이다. 1627년 2월 우치보리 시쿠에몬(바오로)의 세 아들 발타살과 안토니오, 이냐시오는 바다에 던져져 순교했고, 자녀들이 순교한 뒤 아버지 우치보리 또한 신자 15명과 함께 운젠다케에서 성체에 대한 기도를 바치고 순교했다. 또 성내 감옥에 남아있던 미네수케 타유우(요아킴), 마쯔타케(요한) 등 10명도 운젠다케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1613년 아리마에선 세 가족 여덟 명이 강 가운데 모래톱 기둥에 묶였다.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복음을 전한 지 65년째 되던 해였다. 2만 명에 이르는 기리스탄(切支丹, 일본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카하시 몬도(아드리아노)와 하야시카 수케에몬(레오), 타케토미 칸에몬(레오) 등 세 무사와 그 가족은 화형을 당하며 신앙을 증거했다.

 

이처럼 용감하게 순교의 길을 걸어간 나가사키 신자들의 순교와 증거는 지금까지 일본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씨앗으로 살아 있다.

 

[평화신문, 2008년 12월 7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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