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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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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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24 ㅣ No.583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

 

 

얼마 전 서른여덟 살 젊은이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알았기에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만, 열 달 동안 투병하면서 보여준 그의 신앙과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은 저의 이러한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배워 믿고 따른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홍교만

 

경기도 포천에 살았던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38-1801년)는 양근에 사는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외사촌으로, 곧 홍교만의 고모가 권철신의 어머니였습니다. 1777년 진사시에 합격한 그는 고종사촌인 권씨 집안에서 천주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적인 명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비신자 친구들과 잦았던 교류도 단절하였습니다. 그의 딸은 정철상 가롤로에게 시집갔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들 홍인과 함께 서울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월 12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2월 14일 의금부 추국안에 적혀있는 대로 “저희 집에서 압수당한 (천주교) 책은 과연 저의 책자입니다만, 그것이 사학(邪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학문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학문은 무릇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으니, 어찌 그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배교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다음 날인 2월 15일에 는 “큰부모[大父母]를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니, 앞서의 공초에서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도리의 큰 근본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고, 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르고, 또 오직 상제께서 백성들에게 올바른 성품을 내리신다 하여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을 내셨으니[‘天命之謂性’(“중용” 1장), (‘惟皇上帝 降哀于下民’(“서경” 탕고)], 어찌 이를 사학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2월 20일에는 “저는 일찍이 이 학문의 종지(宗旨)가 ‘상제를 존경하며 높이 받든다.’는 뜻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세상에서 이를 사학이라 하는 것은 아마 존경의 도리와 멀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사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의 학문은 정학(正學)이라 하였는데, 이제 와서 만일 예수를 그르다고 하라면, 저는 감히 진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을 어찌 정확하게 알며, 이처럼 독실하게 믿는가?” 하는 질문에,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은 예로부터 중국의 성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인데, 저는 이 책을 자세히 보았으므로 그 설을 독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 지극한 이치의 소재를 말하자면 시 ? 서 ? 역경의 말이 모두 이와 합치하니 이를 사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학문을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며 공부하면서 비로소 얻은 것을 이제 어찌 한마디의 말로써 억지로 뉘우친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강생한 예수를 알고 있으니 이제 갑자기 뉘우쳐 ‘예수가 그르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는 데에서 그의 항구함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순교로 마음이 흔들렸으나 마침내 뒤를 따른 홍인

 

홍교만의 아들 홍인 레오(1758-1801년)는 선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1791년 주문모 신부님이 입국한 뒤로 열성적으로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면서 성사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더없이 겸손하게 말하면서 다른 이들의 장점과 선행들을 즐겨 높이 세우곤 하였습니다. 그는 1800년 주 신부님이 천주교를 강론하는 자리에 동참하였고, 황사영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1801년 2월에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은 뒤 포천으로 이송, 그리고 감영에 갇혔다가 다시 포도청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부친이 순교하고 나자 마음이 여려져 배교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이별한 것이 그토록 고통스럽고 애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사나흘 간격으로 많은 신문을 받으면서 부친의 순교를 생각하고 부친을 따라 걷겠다는 열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홍교만을 아버지로 삼고 황사영을 벗으로 삼았으니, 어찌 참수형을 면하겠습니까?” 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열 달 동안 옥에 갇혀있으면서 갖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해 12월 27일 포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 큰 광채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서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홍교만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확고히 믿었습니다. 믿은 바를 신자들과 함께 실천하였고, 실천한 바를 엄한 형벌을 당하며 피를 흘리면서까지 증언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홍인도 부친이 죽은 뒤 마음이 흔들렸지만, 열 달 동안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결국 순교자인 아버지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순교자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이 위령성월을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08년 11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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