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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왜관 수도원의 건설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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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3 ㅣ No.1520

[앞서 걸어간 길] 왜관 수도원의 건설과 성장

 

 

1960년대 초 무렵 수도원과 왜관읍 전경.

 

 

1952년 왜관에 작은 씨앗이 떨어졌다. 북녘에서 온 수도자들은 하마터면 제주도, 마산, 김천, 서울, 청주 등으로 갈 뻔했다. 어쩌다 왜관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왜관은 낙동강을 통한 교통의 요지로 창녕, 고령, 안동 등을 연결한다. 근대에 와서는 한반도를 뚫고 북쪽까지 이어지는 철도망으로 육지 교통의 연결지가 되었다. 그리고 남북을 잇는 순교자들이 생활했던 곳이다. 수도자들은 이곳에서 전쟁의 폐허를 사회와 함께 극복하고, 동시에 역사적 전통을 베네딕도 정신에 녹이면서 한국화된 수도원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강보다, 철로보다 더 멀리, 세계로 뻗어 나갈 웅지를 키웠다.

 

 

새로운 출발마다 새로운 사명을 담고

 

20세기 초 한국 교회는 박해 시기 100년을 견디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성당을 세우며 지상으로 나왔다. 사회는 급변하고 신자들은 지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했다. 안중근 토마스는 뮈텔 주교에게 대학을 설립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이때는 개신교가 들어와 천주교가 그동안 피로 뿌린 복음의 씨앗을 수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8년 1월 뮈텔 주교는 교육을 담당할 수도회를 물색하기 위해 직접 유럽으로 갔다. 마리아 수도회, 성모 승천 수도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수도회, 성심 선교회, 예수마리아회, 살레시오회 등 여러 수도회의 총장을 만났다. 결국, 뮈텔 주교는 바티칸에서 정보를 얻어 9월 14일 저녁 무렵 뮌헨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상트 오틸리엔’에 도착했다. 이렇게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도’의 정신으로 무장한 수도회가 조선 교회에 동참하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신앙 유지에 매달려있던 한국 교회에서 가톨릭 문화를 창출해 나갔다. 한국 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회였다.

 

조선 천주교회 주교단, 서울, 1924년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앉은 이), 뒷줄 왼쪽부터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경성대목구 부감독 드브레 주교,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 

 

 

베네딕도회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여러 번 새로 시작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사명들이 있었다. 1909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서 도시 내 수도원으로 시작한 베네딕도회는 1913년 아빠스좌 수도원이 되었다. 그리고 1920년 원산대목구(후에 함흥대목구)가 설정되고 한반도 북동부와 북간도 쪽을 담당하러 ‘덕원’으로 이사했다. 이사가 끝난 1927년 덕원 수도원은 주교아빠스좌 수도원이 되었다. 그들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을 초빙하였고, 성당, 수도원, 신학교, 학교, 병원을 고루 갖춘 ‘덕원자치수도원구’로 발전하였다. 나아가 북간도로 진출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수도공동체를 세워 선교 활동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1928년 연길대목구가 설정되었다. 1934년 수도공동체는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때 베네딕도회가 왜관에 자리 잡으며 또 다른 사명을 실천하게 되었다. 흔히들 왜관 수도원은 북한에 있던 덕원 수도원이 피난 와서 정착했다고 한다. 그렇게 간단치 않다. 왜관 수도원의 주춧돌은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수도자들이었다. 한국인 수사들은 성직자를 모두 공산 정권에 빼앗겼다. 북에서 남에서 그들끼리 견디기를 3년, 옛 덕원 선교사인 스위스인 이 티모테오 신부가 책임자로 왔다. 바로 이어 옛 연길 수도원 독일인 선교사들이 왔다. 그들은 함께 생활한 경험이 없었다. 이보다 늦게 덕원의 독일인 선교사들이 왔다. 이어 북한이나 간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독일인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왔고, 한국인 젊은 수도자들도 계속 늘어났다. 말하자면 왜관 수도원은 새 출발이지만, 연길과 덕원의 전통을 섞어 업고 한국적으로 거듭나는 ‘힘겨운 도전’을 수행해야 했다.

 

왜관 수도원은 이처럼 다양한 구성원들을 베네딕도 정신으로 녹여내는 용광로가 되었다. 놀라운 ‘적응력’과 ‘융통성’이 피어났다. 서울 백동에는 독일에서 꽃 화분을 옮겨온 것이라면, 덕원으로 갈 때는 밭을 경작하여 이 화초를 심고 가꾸었다고 하겠다. 왜관에는 덕원 화초에서 딴 씨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밭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정원사는 따라왔다. 그 꽃은 베네딕도 정신에 한국 문화를 입혀 나갔다.

 

이런 성과를 얻는 데 지불한 대가는 만만치 않다. 1949년 5월 덕원 수도원이 공산당에 폐쇄될 때, 독일인 전부와 한국인 성직자가 체포되고 남은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아직 수도원 행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성직 지망수사, 평수사, 신학생, 지원자들이었다. 최고 연장자인 차부제가 인솔해야 했다. 한국인 수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북한 전역으로 거처할 곳을 찾아 나섰다. 실제로는 서로 연락하며 체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활비를 벌고, 아직 체포되지 않은 사제들을 찾아다니며 미사에 참례하였다. 더 나아가 감옥에 갇힌 동료 수도자들을 뒷바라지했다. 흩어진 게 아니었다.

 

1950년이 되면서 덕원의 수사들은 월남을 시도하였다. 먼저 월남한 수사들은 교황사절이나 서울교구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북한에 남은 동료들을 데려오고, 함께 기도하며 살 공간과 비용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는 이들을 지원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를 위시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다. ‘한국인 피난 공동체’를 연합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인 수사들은 ‘가장 처절한 고아 신세로 전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졌다. 유엔군이 북진할 때 덕원 수사들은 그들을 따라 신속하게 덕원으로 올라갔다. 아직 북한에 남아 있던 동료들 덕에 수도원의 복구는 빨랐다. 그러나 겨우 한 달여 만에 다시 떠나야 했다. 북한에 남아있던 수사들까지도 대거 월남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계속 연락하며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인 베네딕도회원들을 환속시키는 것보다 더 큰 폭력은 없다

 

덕원 수사 16명은 부산 중앙 성당 사제관에 방 한 칸을 배정받았다. 연길 수사 2명도 합류했다. 당시 이 삶을 이끌었던 김영근 베다 차부제가 지닌 전 재산이 30달러였다. 김 베다 차 부제는 아침 식사 후 사방에 수소문하여 미군들의 조수일, 목공일, 부엌일 등을 구해 왔다. 수사들은 부두 하역, 미군의 하우스보이로도 일했다.

 

덕원 수사들은 그 혼란 속에서도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준수했다. 수사들은 새벽 5시 정각에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했다가 아침 식사 후 각자 일터로 나갔다. 저녁에 지쳐서 돌아오면 저녁기도를 바치고 식사하고 나서, 간단한 휴게를 했다. 미군에게서 받은 일당과 라이터, 통조림 등의 물건을 공동체에 내놓았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와 같았다. 그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규칙을 실천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하였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한국 지부장 브라이인 제라프티 신부는 이들을 보면서, “베네딕도회는 이 나라의 일상과 문화에 피상적인 영향력을 가진 단순한 선교기관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삶에 필요불가결한 일부였다. 한국에 수도원 제도가 참으로 정착되었다”며 베네딕도회의 가치를 인정했다. 나중에 상트 오틸리엔에서는 덕원 수사들을 보고, “덕원이 이룩한 것, 얼어붙은 북한의 상실 안에서 동료 형제들이 맺은 고난의 열매가 바야흐로 하느님과 우리 연합회 역사 앞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피난시절 미 군종신부들이 덕원 수사들을 적극 도왔다. 머피 신부,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휴 크레이크 신부, 골롬반회 패트릭 오코너 신부, 캐롤 신부, 발테로 비스미이어 신부 등 많은 은인이 있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남은 덕원 수도원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번성하던 베네딕도회원들이 미국의 슬럼가보다도 못한 곳에 있다’고들 한탄했다. 특히 뉴햄프셔 주 맨체스터 성 베네딕도회 성 안셀모 수도원의 사제이며 군종신부로 복무 중이던 맥카시 신부는 덕원 수사들의 형편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엇보다도 덕원 수사들이 이 처참한 현실을 용감히 버틸 수 있는 힘은 옥중 형제들 생각과 이들의 부재에 대한 가없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들은 형제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피난민의 팔자가 아무리 기구하다 한들, 북한살이, 특히 옥중에서 지내는 동료 형제들과 평양교구 사제들의 삶에 비하면 호사가 아니겠는가?” 모든 어려움을 공동체의 특별한 체험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연대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미래를 심는 거름으로 단련되었다.

 

 

왜관수도원과 교회의 문화 쇄신

 

왜관 수도원은 이런 특수한 체험에서 얻은 힘으로 교회 문화를 새로 창출했고, 사회 복지와 정의 실천에 앞장섰다. 나아가 베네딕도회 자체에도 신선한 개혁바람을 불어넣었다. 왜관 수도원은 ‘아빠스 선출’이나 평수사의 수도원 행정 담당 등 개혁적인 발걸음을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내에서도 제일 먼저 내디뎠다. 또 평수사와 성직수사들과의 차이도 먼저 극복했다. 진정 고목에 올라온 새 생명이었다. 한편, 영남 지방을 다니다 보면 매우 외진 곳에도 아름다운 성당이 서 있음에 감탄하게 되는데, 그것은 왜관 수도원이 ‘왜관감독대리구’를 운영할 때 이룩해 놓은 공로다. 그들은 수도원 건물을 다 완성하지 못해 공동 전례가 어려운 상태에서도 왜관감목대리구를 맡았고, 한반도 남동쪽에 수많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 또한 대구교구에서 최초로 레지오 마리아 결성, 한센인 정착 사업, JOC(가톨릭청년노동자협회) 등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한국어 미사 거행, 미사 공동 집전, 농민 운동 등 다방면에서 대구교구의 교회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외에도 전교회장 운영, 교리신학원 창설, 출판과 미디어 사업 등 풍성한 가톨릭 문화를 형성했다.

 

그 왕성한 활동력은 장충동 서울 분원, 부산 성 베네딕도 명상의 집, 남양주 요셉 수도원, 화순 분원을 세웠고, 또 오도 하스 아빠스의 필리핀 디고스 수도원 설립을 도왔다. 2001년부터는 사연이 깃든 미국 뉴튼 수도원을 인수 운영하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북한 침묵의 교회를 위한 활동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덕원 수사 20여 명이 견디어주어 출발할 수 있었던 왜관 수도원은 아빠스를 선출하던 1960년에는 신부 25명(외국인 17, 한국인 8)과 수사 31명(외국인 6, 한국인 25)으로 총 56명으로 불어났다. 2022년 현재는 독일인 선교사 3명을 포함해서 성직수사 52명, 성직지망 수사 5명, 평수사 62명으로 총 119명이다. 왜관 수도원의 개개인, 개별 사건에는 성실하신 하느님의 손길이 드러난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대구문화재위원,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2년 봄(Vol. 57),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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