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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간추린 일본 가톨릭 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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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16 ㅣ No.581

간추린 일본 가톨릭 순교사 (상) 17세기 초 금교령 이후 250년간 혹독한 박해

 

 

본지는 11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거행되는 ‘베드로 키베와 187위 순교자 시복식’을 앞두고 일본 가톨릭교회의 순교사를 돌아보는 특집을 마련한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교회의 시복식은 한국교회에도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시복 시성은 지역 교회의 경사일뿐 아니라 보편교회의 경사이며, 순교영성은 보편교회가 함께 기억하고 살아야 할 영적 토대이다. 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이며 일본 교회사 전문가인 카다오카 치즈코(片岡 千鶴子) 수녀의 글을 3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제 추방령’ 칙서. 히라도시 마츠우라 역사박물관 소장.


- 일본에 천주교를 처음 전파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초상. 코베시립 난반미술관 소장.

 

 

2008년 11월 24일 ‘베드로 키베와 187순교자’를 ‘복자’로 인정하는 공식 선언인 시복식이 일본 나가사키시(長崎市)에서 개최된다. 일본 순교자의 시복준비는 이미 고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81년 일본을 방문하셨을 때 시작되었다. 교황님은 일본 체재 중에 몇 차례나 일본 순교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순교의 언덕 니시자카(西坂)의 순교자들이 증거한 사랑을 현대인들의 마음에 새기도록 전 세계를 향하여 메시지를 발표하셨다.

 

일본은 ‘순교자의 나라’로 유럽의 각국에 알려져 있다. 연구가들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를 모두 합치면 4~5만 명의 순교자가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순교자 중에 1862년에 성인반열에 오른 ‘26 성인 순교자’와 1987년에 시성된 ‘성 토마스와 15 순교자’, 1867년에 복자품에 오른 ‘205 순교 복자’를 모시고 있다.

 

이번에 전 교황님의 일본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1982년 일본 주교단은 정식으로 시복 조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러 실현하게 되었다. 이 188위 시복식의 경사스러움을 앞두고 짧게나마 ‘일본 가톨릭 순교사’를 주제로 순교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키리시탄 순교역사의 특징

 

키리시탄은 포르투갈어 ‘christao’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키리시탄이란 ‘가톨릭의 가르침’ 또는 ‘가톨릭 신자’를 의미하는 일본의 역사적 용어이다.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 중에서 키리시탄사(史)로 구분하는 시기는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가톨릭을 전한 1549년부터 메이지(明治) 정부가 그리스도교 금지를 폐지한 1873년까지 320년간을 일컫는다. 그 중 1614년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금교령(禁敎令)을 선포한 이후 259년간은 대단히 혹독한 박해시대가 이어진다.

 

일본 가톨릭 교회사의 박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오랜 기간 혹독한 박해의 연속이었다는 점 ▲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다는 점 ▲ 긴 박해 기간 중 한명의 사제도 없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계승하였다는 점 ▲ 박해를 감수한 키리시탄은 무저항의 저항으로 인해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서 박해가 끝났다는 점 등이다.

 

일본의 길고도 혹독한 박해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거의 같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일본 교회와 로마교회는 꽤나 큰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는 로마제국의 박해도 길고 오래 계속되었으나 황제에 따라서 혹독하기도 했고 평온하기도 했으며, 광대한 로마제국의 지역을 따라 박해가 심한 곳에서 평온한 지역으로 피난 가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의 박해는 역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법령으로 엄격하게 다스려졌기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감시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황, 주교, 사제, 신자의 튼튼한 교계제도가 움직이는 조직체가 있었으나 일본 교회의 경우는 사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200년 이상 계속되는 가운데 온전히 신자들만의 신앙의 힘으로 신앙을 전승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 황제가 자신의 의지로 박해를 종식시켰으나, 일본의 경우는 ‘신앙탄압’에 대한 국제적 여론과 비판을 받은 일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끝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324년간의 키리시탄 역사는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사 입국에서부터 사제 추방령 선포까지

2) 사제 추방령 선포에서부터 1614년 에도막부의 금교령 선포까지

3) 에도막부의 금교령 선포에서부터 1639년 포르투갈의 무역선 도항 금지까지

4) 신자의 잠복에서부터 종교자유의 부활까지.

 

 

1. 하비에르 선교사 입국에서부터 1587년 사제 추방령 선포까지

 

1549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동료들은 카고시마에 상륙한다. 코레스 테 토-레스, 주앙 헤르난데스, 카고시마의 일본인 무사(武士) 안지로 등이다.

 

하비에르는 입국 후 교토(京都)로 가서 일왕(日王)을 만나 선교 허가를 받고 일본선교의 첫발걸음을 내딛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교토에 간 하비에르는 일왕의 정치적인 힘이 아니고 유력한 다이묘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일본선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계획을 바꾸어 교토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야마구찌에 들러 그곳의 다이묘(大名:영주(領主)) 오오우찌 요시나가를 만나 선교허가를 부탁했다. 유럽의 진귀한 선물을 지참하여 갔을 때 다이묘 오오우찌 요시나가는 매우 만족히 생각하고 선교 허락과 함께 거주지로 다이도우지(大道寺)라는 절을 선물로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일본 키리시탄 선교의 첫발은 시작되었고 야마구찌의 선교에서 한명의 중요한 인물이 세례를 받는다. 그는 가난하고 눈이 부자유한 맹인 비파연주가로 키리시탄 시대의 대단히 훌륭한 선교사로 활약한 이루만 로렌소이다.

 

1551년 포르투갈 무역선의 입항을 알게 된 하비에르는 붕고, 후나이로 거처를 옮긴다. 여기에서도 하비에르는 일본 교회의 중요 인물 중의 한명을 만나는데 그가 후에 키리시탄 다이묘 오토모소우린 프란치스코이다.

 

하비에르는 토레스 신부에게 일본 선교를 위탁하고 자신은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난다.

 

약 2년간의 일본 선교에서 하비에르 성인이 방문한 곳은 카고시마, 히라도, 야마구찌, 교토, 붕고 등 5개 지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인이 일본에 뿌린 선교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일본의 키리시탄은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후 가고 비렐라 신부가 입국했다. 1556년 무역 상인이며 외과 의사인 알메이다가 예수회에 입회하고 1563년 프로이스 신부가 입국한다. 1559년 비렐라 신부와 이루만 로렌소가 교토에 들어가 다음해에 쇼군(13대)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선교허가를 받아 하비에르 성인의 염원이었던 교토 선교에 착수하게 된다.

 

이 와중에 교토의 엔랴쿠지의 불승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였고 비렐라 일행을 교토에서 추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종교간 논쟁의 상대가 되었던 3명 다카야마 히다, 유키야 마시로, 히요하라 시게카다는 큰 감명을 받고 반대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교토지방의 교회는 크게 성장한다.

 

이렇게 하여 키리시탄의 역사는 크게 변하게 된다. 1573년 오타노부나가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시키고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오타노부나가는 선교사를 보호하고 교토에 ‘난반지(南蠻寺)’라 부르는 교회를 세우도록 허가를 하여 3층 건물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 난반지의 교회는 교토의 명소가 되었다.

 

한편, 큐슈(九州)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생긴다. 1562년 히라도에서 포르투갈 선장과 다수의 포르투갈 상인이 살해당하는 ‘미야노마에 소요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무역 항구를 찾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오무라 스미타다가 요코세우라를 포르투갈 무역항으로 개방하여 선교사들을 초대한다. 알메이다, 토레스 신부가 요코세우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오오무라지방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알메이다 신부는 아리마 요시사타의 초대로 아리마 영내의 시마바라, 구찌노쯔에 교회를 세운다. 토레스 신부와 친분관계를 갖게 된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사제들로부터 큰 감화를 받아 1563년 세례를 받으므로(바르톨로메오) 일본 최초의 신자 다이묘가 탄생한다.

 

그러나 영주의 세례에 반감을 가진 일부의 불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요코세우라 교회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포르투갈 무역선은 무역 항구를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1570년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영내에 좋은 항구를 발견하는데 포르투갈 무역항구로 나가사키를 개항한다. 그리고 길쭉하고(長) 튀어나온 곳(갑, 岬=奇)에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키리시탄의 도시 나가사키’의 시작이다. 1571년 나가사키는 200가구에 인구 1000명 정도였으나 포르투갈의 배가 입항하면 다른 외국인과 더불어 몇 배가 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16일, 카다오카 치즈코 수녀(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 · 순심회 수녀원)]

 

 

간추린 일본 가톨릭 순교사 (중) 쇼군에 오른 이에야스(德川家康) 박해 전조 금교령 선포

 

 

-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1614년 전국에 선포한 금교령 팻말. 히데요시 가(家)에 이어 쇼군에 오른 이에야스는 1612년 자신의 영지(嶺地)에서 금교령을 내린데 이어 1614년 금교령을 전국에 확대했다.


- 목숨을 버려 참 생명을 살다, 일본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해졌던 혹독한 형벌들. 사람을 마치 짐승을 잡듯 매달고 고문을 가하고(두번째 사진), 거꾸로 매달아 파놓은 구덩이에 머리를 쳐박아 죽이기도 했다(세번째 사진). 네번째 사진은 물고문 형벌. 이외에도 눈속에서 얼어죽게 하거나 화형, 열탕 고문 등 갖가지 형벌이 가해졌다.


- 키리시탄 다이묘(大名, 영주)의 중심 인물이었던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이후 다카야마 우콘은 다이묘 신분을 버리고 신앙을 택함으로써 모든 재산과 명예를 박탈당했다.

 

 

1579년 순찰사 발리냐노가 입국한다. 하비에르의 입국 이후 30년 동안 선교활동의 영역은 서쪽에서는 나가사키로부터 동쪽으로는 교토지방까지 넓혀졌고 키리시탄은 10만을 넘을 만큼 되었다. 발리냐노 신부는 일본의 상황을 시찰하고 몇 가지의 개혁을 단행한다.

 

선교활동을 조직화하고 일본의 문화를 존중하는 토착화를 선교방침으로 확립했다. 발리냐노 신부의 개혁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인 사제양성을 지향하여 콜레지오(대신학교), 세미나리오(소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580년 아리마와 아즈치 두 곳에 세미나리오를, 후나이에 콜레지오를 설립하고 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도입하여 키리시탄 문화를 꽃피우는 기초가 되었다.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일본인 사제와 동료들은 박해 중에 신자를 도우며 순교까지 이른다.

 

1581년 발리냐노 신부는 교토와 아즈치에서 오타노부 나가의 환대를 받고 각지의 교회를 방문 시찰하고 나가사키에 돌아와 일본교회의 희망에 충만하여 키리시탄 다이묘 오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노부나가, 오토모 소린이 파견하는 소년사절단을 데리고 로마를 향하여 1582년 2월 나가사키를 출발했다.

 

그런데 발리냐노 신부가 출발한 지 4개월 후 오타노부 나가는 ‘혼노우지의 난’으로 갑자기 쓰러져 일본의 정치에 큰 변화가 닥쳐온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정권을 쥐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수하에는 많은 키리시탄 다이묘가 있었다. 선교활동도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을 즈음에 1587년 큐슈를 평정하고 하카다에 개선한 히데요시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교사 추방령을 선포하고 일본은 신의 나라(神國)이므로 키리시탄 선교를 금지함을 선언하고 선교사들은 20일 이내에 일본을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키리시탄 다이묘의 중심인물이었던 다카야마 우콘을 불러들여 신앙을 버리든가 다이묘의 신분을 버리든가 선택하게 했고 다카야마 우콘은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재산과 명예를 박탈당하게 된다. 게다가 나가사키를 몰수하여 직할령으로 만들고 각지에 세워졌던 교회를 모두 파괴시켰다. 일본 교회는 대단히 큰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현명한 대응책으로 박해가 크게 번지지는 않았으나 히데요시의 추방령은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에도 막부 시대를 이어가며 그리스도교 금교령의 근거가 되었다.

 

 

2. ‘사제 추방령’ 선포에서부터 1614년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금교령 선포까지

 

‘사제추방령’ 선포이후, 1590년 인도왕국의 사절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한 발리냐노 신부와 함께 천정소년사절단(天正少年使節團)이 귀국한다.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그들을 호의적인 태도로 접견하나 선교금지령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 접견에 반감을 갖는 이들로 인해 박해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미리 감지한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삼가고 각지로 분산하여 사목에 주력했으므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더욱 심화됐다.

 

키리시탄 다이묘 아리마하루노부의 보호아래 시마바라에서 수업을 계속했던 세미나리오(소신학교)는 소년사절단이 가지고 온 인쇄기로 교과서를 인쇄하는 등 새로운 유럽 문화를 접함으로써 활발한 교육활동이 행해졌다.

 

그러던 중 1597년 26성인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발단은 사제추방령이었다. 히데요시는 도사(土佐)에 표착한 산 페리페호가 법령을 어기고 선교사를 승선시켰다는 이유로 배의 적하물을 모두 몰수했다. 국내에서도 선교사들이 금지령을 어기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프란치스코회의 베드로 팝치스타 신부와 6명의 외국인 선교사, 신자 등 26명을 체포하여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에서 처형한 것이다. 26성인의 순교는 일본의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 의하여 일어난 최초의 순교사건으로서 국내에서는 물론, 유럽에까지도 충격을 준 에도시대의 박해와 순교 역사의 전조(前兆)가 되는 사건이다.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박해는 약간 완화되었다. 바로 그때, 발리냐노 신부와 세루케이라 주교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주교좌를 나가사키에 두었던 관계로 나가사키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일본의 로마’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키리시탄의 도시 나가사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611년, 나가사키에는 11개의 교회가 건립되었고 주일과 대축일에는 어느 교회에서나 신자가 흘러넘쳤으며 그 중 몇 곳의 교회에서는 2~3회 나누어 주일미사를 해야 했고 그때마다 만석이 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한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은 일본 정치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쥔 후 1603년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열고 1605년에 쇼군직(장군)을 양도하여 정권을 도쿠가와 가문이 계승함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사카에 있는 히데요시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에게 기대하는 유력한 다이묘가 많았으므로 도쿠가와 가문의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확립하기는 힘들었다.

 

이에야스는 1614년 오사카의 전투에서 히데요시가(家)가 완전히 멸망되기까지 자신의 편을 모으기 위해 만사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교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키리시탄 선교는 관동지방에서부터 관북지방까지 광범위하게 넓혀졌으며 신자 수는 37만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선교사들이 수차례 사제추방령을 거두어주기를 청원함에도 응하지 않고 히데요시가 발표한 사제추방령을 취소하지 않은 채 국내에서 키리시탄 금지는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내 키리시탄을 싫어하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영내에서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 시복되는 188위 순교자중, 구마모토의 다케다 고효에 등은 1603년 열렬한 일연종(日連宗) 신자였던 영주 가토우 기요마사에 의해, 이끼쯔끼의 니시켄카는 1609년 히라도의 다이묘 마츠우라의 명에 의해 순교한다. 이윽고 박해의 검은 구름은 교회의 보호자이었던 키리시탄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의 영지에서부터 시작됐다.

 

1612년, 오카모도 다이하찌 사건을 계기로 아리마 하루노부는 카이에 유배되어 죽는다.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는 배교하여 박해자로 바뀌며 세미나리오는 아리마에서 쫓겨나 나가사키로 옮겨간다. 같은 시기에 이에야스는 슨뿌성에 자신의 가신단들 중에도 키리시탄이 있음을 알게 되자 대단히 분노하여 1612년 도쿠가와의 영지 안에서 키리시탄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1614년에는 전국의 다이묘 영지에까지 금지령을 내려 전국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린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23일, 카다오카 치즈코 수녀(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 · 순심회 수녀원)]

 

 

간추린 일본 가톨릭 순교사 (하) 순교의 피 적신 땅 마침내 '부활'을 맞다

 

 

- 1858년 개국을 맞아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역에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 오우라 천주당은 250년만에 나가사키에 재건된 교회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 금교령을 철회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다.

 

 

3. 에도막부의 금교령 선포에서부터 1639년 포루투칼 무역선 도항(度浦)금지까지

 

1614년 오사카 전투 전에 막부는 전국에 금교령을 선포하여 선교사와 다카야마 우코 등을 나가사키에 소집하여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시켰다. 4개 수도회의 선교사 98명이 일본을 떠났고 47명의 사제들은 신자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일본 안에 잠복하였다.

 

선교사를 해외로 떠나보낸 후 나가사키에 있던 11개의 교회를 비롯한 각지의 교회는 파괴되었으나 신자들은 그대로 신앙을 지켰다. 막부는 이제 키리시탄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종용하고 참혹한 박해를 가하는 순교의 시대로 들어간다.

 

오사카의 전투에서 최대의 반대세력이었던 히데요시가(家)를 멸망시킨 후 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와 똑같이 키리시탄의 금지를 실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표시로 1619년 교토의 키리시탄 52명을 로쿠죠가와하라에서 화형에 처한다.

 

이 사건이 본보기가 되어 1614년 금지령 선포 이후 박해를 삼가하던 다른 다이묘들도 자신의 영내에 있는 키리시탄 박해를 시작하게 된다. 키리시탄 문제로 막부의 문책을 받아 다이묘 신분을 박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에서는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했으므로 키리시탄은 자연 소멸되었으리라 여겨 엄격한 문초는 없었다. 그러나 키리시탄은 소멸될 기색은 보이지 않고 선교사들은 법령을 어기고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막부는 잠복해 있는 선교사들을 은닉시킨 신자들을 찾아내어 본보기로 처형하라고 명령한 후 나가사키에서 선교사와 신자 55명을 체포하여 화형과 참수에 처했다. 162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겐나(元和)의 대순교’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잠복해 있으면서 신자들에게 성체와 고해성사를 통해 위로하고 격려하였고 교우들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제를 보호하고 자신의 집에 은닉시키는 것을 계속하였다.

 

162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장군직을 이에미쯔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은퇴장군이 된다. 도쿠가와 이에미쯔는 도쿠가와 가문의 정권확립의 수단으로 키리시탄 금교령을 최대한 이용한 장군이다. 정권확립이란 전국의 다이묘들을 완전히 도쿠가와의 가문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키리시탄 금교령 의지를 밝히는 표지로 에도의 감옥에 수감된 하라몬도를 포함한 50명을 화형에 처했다.

 

당시 에도에는 쇼군 이에미쯔 장군의 취임축하식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다이묘들이 머물고 있었다. 이에미쯔는 자신의 위엄과 키리시탄 금지령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다이묘들 앞에서 50명을 처형했고 그 이야기는 즉시 전국에 퍼져나가 다이묘 영지 내에서는 박해가 격렬해졌다.

 

시마바라의 영주 마쯔쿠라 시게마사가 이에미쯔에게 키리시탄 박해를 게을리하고 있음을 비난하자 1627년부터 더욱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 금교령을 따르지 않는 우찌보리 사쿠에몬에게 뜨거운 열탕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나가사키에는 이에미쯔로부터 키리시탄 탄압의 특별 임무를 띠고 온 나가사키 부교(奉行, 법행정 집행관) 미즈노가와 시노가미가 부임했다. 그는 키리시탄들에게 키리시탄을 버리든가, 마을을 떠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다.

 

많은 키리시탄들은 마을을 떠나 추위에 굶어 죽는 순교를 택하였다. 막부는 거기다 키리시탄을 밀고하는 자에게는 상금을 주겠다는 팻말을 세웠고, 상금에 눈이 어두운 이들의 밀고로 잠복해 있던 선교사와 숨어사는 신자들이 차례차례 체포된다.

 

1633년 니시자카의 언덕에서는 소년사절단의 한명이었던 나카우라 쥴리안이 아나쯔리(거꾸로 구멍 매달기) 고문으로 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34명의 사제와 약방 주인 미카엘과 그의 동료 46명의 키리시탄이 순교했다. 1636년에는 포르투갈 상인과 키리시탄의 관계에 의혹의 눈을 돌렸던 막부는 데지마(出島)를 구축하여 강제이주시켰다.

 

1636년 ‘마법을 사용한다’고 두려움을 주었던 킨츠바 지효우에 신부가 2차례에 걸쳐 아나쯔리형을 받고 순교했다. 1639년엔 로마에서 사제가 되어 잠입 귀국해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베드로 키베(?部)신부가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에도에서 이에미쯔에게 직접 문초당한 후 순교했다. 슈몬 부교(奉行) 이노우에의 기록에 “키베 베드로는 배교하지 않았다. 꼬챙이로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쇄국은 완성되었다. 무역은 네델란드와 중국 두 나라에 한하여 실시되었으며 무역권은 막부가 완전히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 셈이다. 1643년 일본의 마지막 사제 코니시 만쇼 신부가 순교한 후 일본 교회는 단 한명의 사제도 존재하지 않는 ‘잠복시대’에 들어간다.

 

 

4. 잠복에서 종교자유의 부활까지

 

1640년대의 중반기에는 드러나는 순교사건은 없어지고 이미 키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짐작했으나 전국의 현상금 팻말과 금교령의 팻말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데리우케(寺請制度, 모든 국민은 절에 소속되는 제도)와 후미에(예수, 마리아 상을 만들어 밟게하는 일)도 계속 행하여졌다. 신자 색출을 위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이용했으나 막부가 걱정하는 그대로 실제로 키리시탄은 잠복한 채 존재했다.

 

막부의 혹독한 감시제도의 와중에서도 나가사키의 각지에서 키리시탄은 잠복조직제도를 만들었다. 초카타가 전체 조직의 총 지도자로 기도, 교리를 전승했고 교회 전례력을 따라 불완전하지만 1년간의 신앙생활을 지도했다. 미스카다는 세례를 주는 역할로 키리시탄 가족의 신앙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여 한 명의 사제도 없는 가운데 신앙을 전승케 하였다.

 

1858년 개국을 맞아 나가사키의 외국인 거류지에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은 250년만에 나가사키 땅에 다시 재건된 교회였다. 우라카미 마을(浦上村)의 키리시탄이 “우리들은 모두 당신의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푸치창 신부에게 신앙을 고백함으로 일본 교회는 다시 로마 교회와 접목하는 부활을 맞이한다.

 

‘키리스탄 부활’의 시대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리시탄들은 마지막 박해, 즉 우라카미욘방쿠즈레, 고토쿠즈레등의 고난을 봉헌해야만 했다.

 

막부는 쓰러지고 메이지(明治)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나 메이지 정부는 막부의 키리시탄 금교령을 계속 유지하였다. 우라카미 마을 전 신자가 절에 소속된 신분을 거부하자 정부는 우라카미의 키리스탄 모두를 전국 각지로 유배시켰다. 이 신앙탄압이 미, 유럽 각국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자 일본 정부는 1873년 키리시탄 금교령을 제거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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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259년만에 금교령의 폐지였다. 전국에 유배갔던 우라카미(浦上) 마을 주민 키리스탄 3384명중 613명이 유배지에서 순교했다. 고향 땅에 돌아온 우라카미 신자들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된 우라카미를 바라보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은 것을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기쁨으로 알고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게 되었다.

 

“큰소리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날이 꼭 온다”고 믿었던 그 날이 온 것이다. 그날이 오면 가장 먼저 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한 성전 건립을 시작했다. 30년만에 붉은 벽돌의 우라카미 교회를 완성하여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지금, 나가사키현 안의 모든 교회에는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산다’는 선조들의 모범적인 메시지를 감사의 기도로 드리며 오늘도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30일, 카다오카 치즈코 수녀(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 · 순심회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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