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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덕원에서 왜관까지, 숨겨놓으신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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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4 ㅣ No.1521

[앞서 걸어간 길] 덕원에서 왜관까지, 숨겨놓으신 인연

 

 

대구대교구는 6·25전쟁 중 유일하게 북한군이 들어오지 못한 지역이다. 치열한 낙동강 전투 덕에 영남 일대가 보전되었다. 1952년 6월, 그 강변 두 고을에 ‘북한으로 가야 한다’는 덕원 수도자들이 정착했다. 곧 가실과 왜관이다. 그 속에 오래전부터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인연의 끈’이 보인다.

 

 

둥지를 옮긴 사람들

 

북한군은 1949년 5월 11일 밤 덕원 수도원의 독일인 신부 8명, 한국인 신부 4명, 독일인 수사 22명을 체포했다. 5월 14일 저녁에는 남아 있던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 등 총 99명의 한국인들이 수도복과 기도서를 뺏기고 인적사항을 자세히 기록한 후 한 명씩 차례로 쫓겨났다. 수도원 앞에서 모여 신학생, 평수사, 성직지망 수사 순으로 행렬을 지어 비탈길로 내려갔다. 이 빈털터리들의 행렬 위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 후 3년, 그들은 마침내 왜관에서 새로운 태양을 띄웠다. 덕원의 둥지를 송두리째 옮긴 이들의 인생행로는 그들이 걸어 내려온 거리보다 몇 배 더 다양했다.

 

덕원에서 왜관으로 오기까지 성직지망 수사로는 김상진 토마스, 김영근 베다,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송 크리소스토모, 서상우 요한, 이 보니파시오, 최창성 바오로, 황춘홍 다미아노, 연길 소속의 양기옥 쁠라치도 등 9명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함흥교구 소속 신학생 최명화 베드로도 있었다.

 

평수사로는 권영옥 마오로, 김복래 레오나르도, 김 알로이시오, 김 요셉(환속), 김용택 필립보, 김삼도 마인라도, 김재환 쁠라치도, 명용인 디다고, 방삼덕 빈첸시오, 이석철 미카엘, 임근삼 콘라도, 조재환 스테파노, 한천수 이시도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청원자로 훗날 왜관에서 서원한 이근재 야고보(부르노 수사), 권 스테파노(마태오 수사, 환속)와 최 안드레아가 있었다. 연길 수도원 소속의 최영호 비안네 신부와 김요셉 수사도 여기에 합류했다.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덕원 신학교 교장 안셀모 로머 신부는 한국인 수사들의 책임자로 차부제 김영근 베다(1918-2002) 수사를 지명했다. 김영근 베다 차부제는 평수사들을 제외하면, 성직지망 수사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였다. 추방된 덕원 수도자들은 김영근 베다 차부제를 중심으로 연락체계를 유지했다. 김영근 베다 차부제는 서상우 요한, 임근삼 콘라도 수사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평양교화소에 수감된 형제들을 뒷바라지하고, 덕원 쪽에는 김재환 쁠라치도, 방삼덕 빈첸시오 수사 등을 머물게 했다. 김영근 베다 차부제는 8개월 남짓 담배공장에서 일하며 평양교화소에 약품을 넣거나 소식을 살피다가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가 옥사하자 1950년 2월 동료들과 월남했다. 이후 임근삼 콘라도 수사가 연락망을 유지하고 한국 수도자들의 월남을 도모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울에 도착한 김영근 베다 차부제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과 연락을 이어가며 38선 이북에 남은 동료들을 빼내 오고자 노력했다. 한편, 수도원 해체 이후 성직지망 수사 5명은 먼저 월남해 신학교(성신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오틸리엔에서는 이들이 유럽에서 공부를 끝내고 서품되어 한국에서 베네딕도회를 이끌어 가도록 할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 3월 허락을 얻지 못한 김상진을 제외한 수사 4명이 유학을 떠났다. 떠난 이들은 학기 중에 한국 전쟁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남은 김상진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목숨을 잃었다.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951년 사제품을 받고 왜관에서 공동체 재건을 준비하기 위해 때맞춰 귀국했다.

 

그러는 사이에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김영근 베다 차부제는 국군을 따라 평양 쪽으로 올라갔다. 또 동부에서도 연합군이 원산에 상륙하자 방삼덕 빈첸시오와 김재환 쁠라치도 수사 등이 덕원 수도원으로 달려가 성당을 복구하며 형제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두 달 후 그들은 서부 평양 쪽과 동부 덕원 쪽에서 각각 수단껏 남하해야 했다. 이 후퇴로 북한에 남아있던 수도 형제까지 다 부산으로 모일 수 있었다. 1950년 12월 9일 밤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오면서 덕원 수사들은 기막힌 사연들을 만들어갔다. 김 베다 차부제는 위조된 ‘남파 공작원증’을 소지하고 월남했다. 또 사리원으로 피난 갔던 김삼도 마인라도 수사는 본당 사제관에 머물면서 전입 신고를 하러 갔다가 인민반장으로 뽑혔다. 김 수사는 ‘늑대의 탈을 쓴 양’으로 인민반장 노릇을 했다. 그는 북한군의 징집령을 두 번이나 용케 모면하고, 유엔군이 입성했다 후퇴할 때 따라 내려와 부산에서 수도 형제들과 합류했다. 연로하고 보행 장애를 가진 김복래 레오나르도 수사는 홀로 전쟁을 겪으며 대구로 수도 형제들을 찾아오기도 했다. 또 신학생 이동식 보나벤투라 수사는 수도원에서 추방된 후 산골로 들어갔다가 붙잡혀 북한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그는 미군이 반격하던 1950년 10월 천신만고 끝에 미군 포로로 잡히는 데 성공했다.

 

한편, 전쟁 중에 잃은 이들도 여럿 있다.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는 1951년 11월 19일 대구에서 선종했다. 1949년 1월 19일에 덕원에서 서원한 마지막 수련자였다. 그리고 덕원 수도원 설립 세대에 속하는 권영욱 마오로 수사는 1952년 5월 27일 눈을 감았다. 1931년 5월 9일에 덕원 수도원 임시 성당에서 서원한 그는 인쇄공과 도안사로 일했으나 병치레가 잦았다. 권 수사는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가르친 첫 한국인 수사이다.

 

 

부산과 대구 주교관에서의 피난생활

 

덕원 수사 15명은 부산 중앙성당 사제관에 방 하나를 배정받고 피난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다. 가구와 식기도 없고 돈도 없었다. 먹을 게 생기면 돌아가며 겨우 먹었다. 수도자들은 닥치는 대로 일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세월이었으나 수도자로서의 신원은 잊지 않았다.

 

이때 덕원 수사들을 위해서 메리놀회 휴 그레이그 신부가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수사들이 니콜라오관을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중에 주교는 니콜라오관을 학교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남산동 유스티노 신학교 부속건물 2층 방 다섯 개를 쓰라고 제의했다. 또한 미사와 시간경을 위해 주교의 경당을 쓰도록 했다. 1951년 6월 6일 미 군종신부였던 맥카시 신부는 신학생 수사 5명과 평수사 6명과 대구로 이사를 단행했다. 대구 주교관에서도 베네딕도회원들의 형편은 당시 여느 전쟁 피난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덕원에서 교육받은 수사들은 목공, 철공, 제본 등에 숙련되어 있었다. 단풍나무로 유치원 의자를 만들거나 헌 깡통을 함석가위로 오려 필통이나 붓통을 만들었다. 당시 계산동본당 주임 신상조 신부가 성가집을 발행하면서 수사들에게 제본을 맡겼다. 수사들이 목공과 철공 기술로 제본기를 만들어 작업하는 것을 보고 신 신부는 감탄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도 피난 공동체 수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덕원 수사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는, 가실에 정착하고 지은 수사들의 침실이 너무 작은 규모인 것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또 18년간 당가였던 임근삼 콘라도 수사가 얼마나 살림을 엄격히 살았는지도 아직 회자되고 있다. 덕원 수사들은 정착한 이후 그 엄청난 사연들에 침묵했다. 수도생활 80년을 지내고, 2018년 104세 일기로 왜관에서 선종한 이석철 미카엘 수사처럼 그들은 묵묵히 변화를 살아냈다.

 

 

가실과 왜관의 역사 속 숨은 인연

 

드디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미국 뉴튼 수도원에 체류 중이던 덕원 선교사 이성도(李聖道) 티모테오 비털리(Timotheus Bitterli, 1905-1990) 신부를 이 피난 공동체의 장상으로 임명했다. 이 티모테오 신부는, 스위스에서 공부를 마친 노규채 신부와 일본에 있던 이 보니파시오 수사 등과 함께 1952년 1월 25일 공동체에 도착했다. 몇 달 후인 5월 9일, 이 티모테오 신부는 함흥교구장 서리 및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에 임명됐다. 이제는 정말로 제대로 된 공동체의 생활터가 필요했다.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는 이 티모테오 신부에게 낙동강 근처 가실성당을 제안했다. 이에 현장 답사를 다녀온 노규채 신부는 가실성당이 수도 공동체 장소로는 너무 작다고 판단했다. 티모테오 신부는 가실과 왜관 두 곳을 요청했다. 기차역과 국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근처에 과수원이 많아 수사들의 좋은 일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숨은 인연도 깔려 있다.

 

본래 피난 공동체가 받으려고 했던 니콜라오관은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1875-1938) 주교가 1923년 대구시의 성당못 북쪽에 지은 신학교 별장이었다. 니콜라오는 드망즈 주교가 다니던 소신학교 이름이었다. 그런데 드망즈 주교는 1875년 독일과 프랑스가 소유권을 다투던 지역인 알사스 로렌 지방의 스트라스부르 교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생전에 덕원 수도원의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와 친밀했다. 또한, 가실성당은 드망즈 주교의 특별한 추억이 서린 곳이다. 주교는 1898년 조선에 입국하여 1899년 부산본당에 파견되었다. 이때 고향인 프랑스 보즈산맥 마을에서 교회 학교가 국유화되자 책임자였던 본당 신부가 학교 건물 앞에 걸려 있던 ‘작은 종’을 따로 떼어 선교사 드망즈 신부에게 보내주었다. 신부는 이듬해 부산성당을 떠나면서 이 종을 다시 경북 지방의 선교 중심인 가실성당으로 보냈다. 당시 가실성당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종을 본당 옆에 있는 감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그 감나무에 매달린 종은 1926년 가실성당이 새 종 ‘안나’를 제작한 후에도 있었는데, 왜관 수도원 수사들이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왜관본당은 베네딕도 수도원이 서울 백동(혜화동)에서 덕원으로 이사하기 시작할 무렵 공소로 설정되어, 수도원이 덕원에 안착할 무렵 성당이 지어졌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지은 붉은 벽돌조 성당과 사제관이 아직도 있다. 6·25전쟁 기간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2명이 순교했는데 4명의 순교자가 이 성당을 짓거나 이곳에서 사목 활동을 한 신부들이다. 초대 주임 카다르(Joseph Cadars, 姜達淳) 신부, 2대 주임 리샤르(Richard, 李東憲) 신부, 3대 주임 를뢰(Leleu, 盧) 신부와 리샤르 신부가 요양 갔을 때 그를 대신했던 코르데스(Cordesse, 孔) 신부가 그들이다. 이들은 수십 년간 대구교구의 선교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말 가택연금 되었다가 해방 이후 1948년 대전교구가 설정되어 모두 그곳으로 재배치되었다. 이들은 새 출발을 하였으나 곧바로 전쟁에 휩싸였고, 4명 모두 1950년 9월에 순교했다. 1955년 리샤르 신부의 여동생이 왜관본당을 방문하여, 오빠가 8년간 사목하던 본당을 살폈다. 여동생이, 생존했다면 55세밖에 되지 않을 오빠를 그렇게라도 만나고자 한 것은 추억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여동생을 맞이한 신부도 당시 왜관본당 주임인 김영근 베다 신부였으니 서로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6·25 순교자로 시복될 대상자가 없는 대구대교구에서 왜관본당(現 왜관 수도원 자리)은 20세기 순교자의 실제 생활터다. 베네딕도회는 북한에서 38명의 순교자를 내며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내주고 왔다. 대구교구 내 어느 단체보다도 6·25 순교자를 제대로 느낄 덕원 수사들이 이 성당에서 남북 순교자의 체온을 이으며 ‘형제애’를 키우는 일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실제로 한국전쟁 동안 전국에서 10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이동하고 있었는데, 우리 사회에는 그 타지인들을 내 식구로 품은 건강함이 있었다. 왜관 수도원은 전쟁의 폐허에서 건강하게 남북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대구문화재위원,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2년 여름(Vol. 58),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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