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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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홍필주 필립보와 강완숙 골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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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01 ㅣ No.579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홍필주 필립보와 강완숙 골룸바

 

 

어머니 강완숙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도운 홍필주

 

지난 호에 소개한 홍익만 안토니오의 큰사위가 홍필주 필립보(1774-1801년) 입니다. 그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1790년에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그는 계모인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를 친어머니처럼 섬기며 신앙을 실천하였습니다.

 

본디 그는 타고나기는 착하였으나 정확하지도 근면하지도 않았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겪고 나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95년 5월에 주문모 신부님을 집에 모시면서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아주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놀라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신부님을 도와 미사를 드렸으며, 신부님의 처지 때문에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는 온갖 일을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신유박해로 체포된 뒤 관리들이 잔혹하게 고문을 하며 신부님에 대한 정보와 신부님이 피신해 있는 장소를 대라고 추궁하였으나, 크나큰 정신적인 힘으로 견뎌내며 해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 얼마 동안 망설였습니다. 이때 조사를 받으러 가던 어머니에게서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매느냐?” 하는 말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그는 형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하였고, 1801년 8월 27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회 조직과 여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강완숙

 

홍필주의 어머니 강완숙 골룸바는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양반의 서녀로 태어났습니다. 덕산지방의 양반 집안으로 시집을 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뒤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했습니다. 서울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한 그녀는 주문모 신부님을 집에 모시면서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위로 신부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정숙하고 방정하게 하여 강론하면서 사람들을 밝혀주었는데, 종이 울리면 박(拍)이 따르는 듯했고, 뜨거운 사랑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줌이 마치 불이 땔감에 들어가듯 하였습니다. 어려움이 몰려오면 이를 물리쳐 헤쳐 나가기를 마치 질긴 뿌리에 날카로운 기구를 대는 듯했습니다. 세속의 위험에 용감히 나아가기를 남자가 전진(戰陣)에 임하는 듯했습니다.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다독이며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내적으로는 교리를 극진히 준행하고, 외적으로는 여회장의 직분을 다하고자 힘썼습니다. 곧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치를 이 세상에 알리고 그 가치와 이상을 구현하려고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침식을 잊으면서까지 전교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그녀는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받지 않은 형벌이 없었고, 당하지 않은 고통이 없었습니다. 몸에는 제대로 된 살갗이 없었고, 정강이뼈가 부서졌으나 평온한 얼굴로 조금도 초췌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형조에 옮겨져서 한 달 이상을 지냈을 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뜨거워져서 온전히 고초를 감당하여 오직 영광스럽게 승리하는 것만을 낙으로 삼았고, 음식을 들고 담소하기를 보통 때와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이 학(學)을 배워 스스로 믿었으니 죽으면 천당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녀는 ‘사학(邪學)의 여괴(女魁)’로 사형을 언도받고 1801년 5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은 강완숙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일생을 살았던 그녀가 걸은 길은 천주교회만을 위한 길이었다기보다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구현하고자 한 길이어서 그녀는 역사를 위해 일어선 조선 여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열정적 사랑과 신뢰에 뿌리를 둔 그녀의 삶은 완전한 의탁, 용기, 효와 연민을 바탕으로 한 섬김과 돌봄, 헌신과 열정적인 선교, 순교 등 이 모두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빠진 여인으로서 짧은 신앙생활 동안 불꽃 같은 열정으로 활동하여 조선 교회를 이끈 여걸을 하느님은 조선 천주교회의 버팀목으로 쓰셨습니다”(조광 외, “순교자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 가톨릭출판사, 2007. 참조).

 

이 묵주기도 성월에, 신부님을 모시면서 교회 조직과 여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셨던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삶과 신앙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또한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서 훌륭하게 살았던 홍필주 필립보의 신앙이 더욱 새롭게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08년 10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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