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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와 자아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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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297

기도와 자아인식

 

 

서론

 

‘사목’은 오늘날 점점 더 심리학의 전문분야가 되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영혼-psyche'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지 그리고 무엇이 해가 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목적 경험에 신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 때로는 비판을 잃은 채 - 영적생활의 지도를 위해서까지 이제는 심리학적인 방법론을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오늘날 사목이 심리학의 인식, 통찰들을 더 이상 간파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행복을 심리학에서 기대하고 신학을 심리학에 맟추고 또 그 아래 굴복하는 대신에 종교적인 실천의 심리학적인 체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보다 더 우리 시대의 인간들을 위해서 유익하지 않을까. 신학이 단지 다양한 심리학적인 가르침을 따르려고 한다면 심리학자들로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오늘날 신학자들에게 모든 시대의 기도하는 자들이 얻은 풍부한 체험들을 재발견하고 오늘날의 사람들을 위해 더욱 풍요롭게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3-6세기의 수도승들에게서 볼 수 있는 기도의 양식은 심리학적인 체험들을 찾아낼 수 있는 보고(寶庫)이다. 고대 수도승들은 종교적인 길과 심리학적인 길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순수한 종교적인 길은 동시에 심리학적인 길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길은 오늘날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심리학적인 통찰들과 방법들은 내포하고 있다. 고대 수도승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자아인식의 원천이요 오늘날 우리가 심리학적인 기술들로써 치유시키고자 시도하는 모든 상처들을 위한 치료제이었다. 기도는 동시에 분석적이고 치료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기도 중에 인간은 자신의 모든 그릇된 자세와 병들을 알아내고 기도하면서 치유를 체험한다. 기도하는 자는 단지 열심해 질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성숙해지고, 건강해지고, 지혜로워지고, 건전한 사람이 된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는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발견한 사람, 그는 자기 자신과 동일시된 사람, 그는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심리학적인 그리고 임상적인 실천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자아실현은 수도승들에게는 시종 견디어낸 기도의 결과였다. 물론 자아실현이 기도의 목표는 아니었다. 수도승들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으려 한 것이다. 오늘날 추구하고 있는 자아실현의 이상에서는 인간이 중심에 있다. 모든 것이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하느님마저 인간의 자아실현에 봉사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실천들의 목표는 모든 인간적인 능력들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기초도 인간의 전체성에 속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기에 이것들을 발전해야 한다. 여기서 하느님은 단지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내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그분에게 관심을 가진다. 수도승들은 자신을 실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방심하며 살아갈 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할 때,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자아인식을 통해서 가능하다. 유명한 수도승이며 저술가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 +399)가 이미 오래전 이것을 깨달았다: “네가 하느님을 알고자 하면 우선 네 자신을 알도록 힘쓰라.”

 

훨씬 그를 앞서 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211)는 인간은 자아인식에서부터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로 옮겨간다고 하였다:

 

“모든 인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또한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닐루스(Nillus +430)는 한 젊은 수도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 비슷하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당신 자신을 아십시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힘들고 더 많은 작업을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알게 되면 하느님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도승들이 뜻하는 자아인식은 두 가지 관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반사되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으로부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간의 자아인식에 대한 이해를 오리게네스(Origenes)와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중세기의 수도승 저술가들 끌레르보(Clairvaux)의 베르나르도(Bernard +1153)와 성 티에리의 빌헬름(Wilhelm +1148)에게서도 볼 수 있다:

 

“너를 알라, 너는 내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그 모상인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네 안에서 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인간이 변형된 하느님의 모상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너는 하느님의 모상임을 알아야 하고 네가 낯선 모상으로 가려져 있지 않은지 알아내야 한다. 너의 존귀함을 생각하고 어떻게 나빠졌는지 부끄러워하라. 너의 추함 때문에 몸서리치도록 네 아름다움을 부정하지는 말라.”

 

3-6세기의 수도승들은 자아인식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인 비참한 면들을 보다 강조하였다. 자아인식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죄인으로서 체험하는 겸손의 길이다:

 

한 형제가 노부(老父) 시소에스(Sisoes)에게 이같이 말했다: “나는 내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남을 봅니다.” 그러자 그 노부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네 생각이 하느님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그렇게 위대한 일은 못된다. 보다 위대한 일은 네가 모든 피조물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와 함께 육체적인 수고는 겸손의 정신으로 인도한다.”

 

수도승들의 아버지인 안토니오(+356) 역시 자아인식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데 있다고 하였다:

 

노부(老父) 안토니오는 다른 한 노부 포이멘(Poimen)에게 말했다: “인간이 그의 죄를 하느님 면전에서 들추어내는 것과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유혹이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인간의 훌륭한 업적이다.”

 

이상의 두 관점이 인간적인 자아인식에 속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그 자신 안에 넣어주신 존귀함과 아름다움과 선, 그리고 하느님의 궁전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알아야 한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 모상을 가리고 일그러뜨리는 어둠, 악, 오류, 뒤바뀐 것들과 악마적인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를 치유하고 본래의 모상을 회복시켜 당신이 의도하셨던 바대로 그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아실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실현한다. 또는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의 모상을 실현하신다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적합할까? 고대 수도승들이 걸어간 길은 기도를 통한 자아인식의 길이었다.

 

 

1) 기도는 자아인식의 원천이다.


a) 기도는 자아인식을 강조한다.

 

수도승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말하고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고자 한다. 수도승은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자로 하여금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마음의 작업을 하도록 강요하신다는 것을 거듭 체험하곤 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거듭 되돌아보게 하셨는지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내가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얼마나 보기 싫고 불구인지, 더러움과 얼룩과 벌레들로 가득 찼는지를 보도록 나와 대면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랐으며 내게서부터 어디로 도망칠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우리 자신을 피할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도 중에 자신을 회피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도 중에 거듭하여 우리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고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시며 보여주신다. 닐루스(Nillus)아빠스는 기도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마음을 상해 준 형제에게 대한 원한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기도시간에 네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한 노부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또 우리의 현실과 대결하지 않는 모든 기도는 우리에게 무익하다고 하였다:

 

“기도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란 마치 허공을 향해 팔을 뻗치는 것과 같다.”

 

기도가 자아인식을 강요한다는 것은 체험적인 사실이다. 수도승들은 그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사탄은 질투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나쁜 생각들과 격정을 불러 일으켜 기도를 방해한다.”

 

수도승은 이에 대해 놀라지 말고 그것을 정상으로 여겨야 할 것이며 오히려 에바그리우스(Evagrius)의 말대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여야 한다:

 

“올바르게 기도하려면 올바르지 않은 것을 각오하며 굳굳이 견디어내라.”

 

생각들과 격정들이 기도하려는 우리를 방해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고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에 대해 작업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성 티에리(Thierry)의 빌헬름(Wilhelm)은 바로 그가 기도를 시작하려 할 때면 생각들이 홍수처럼 밀려옴을 아주 잘 묘사하였다. 그는 경건하게 기도하려고 밀려오는 생각들을 모조건 억누르거나 제거시키지 말고 의식적으로 그쪽으로 향한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만 방해를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 근본을 규명하고자 애쓴다:

 

“그래서 나는 내 제물을 제대 앞에 둔 채 초조한 마음으로 내 자신과 함께 내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나는 내 자신을 거슬러 하느님의 말씀의 등잔에 불을 댕기고 분노하고 격분한 정신으로 만들어 내 의식의 어둔 곳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내 마음의 빛으로부터 나르르 분리시키는 어둠들이, 역겨운 어둠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끝내 밝혀내려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느새 못된 날파리떼들이 내 눈 안에 날아 들어오고, 그러면 나를 내 자신의 의식의 거처로부터 몰아내는 데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내 마음의 거처로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왜냐하면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 때, 정돈하고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무질서하고 형형색색의 혼잡스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홍수처럼 내게로 덮쳐온다. 그것들은 애초에 마음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마치 내가 그것들을 심판하려고 앉아 있기나 하듯 의자 위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나는 그것들 각각의 내 마음 안에서의 합당한 자리를 지정해 주기 위해 그 하나하나의 얼굴과 의미를 볼 수 있도록 내 앞에 설 것을 명령한다.”

 

그는 생각들을 가리웠던 안개가 걷히고 빛이 비추이면 그의 감정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이제 본래의 자리로, 분위기와 감정에로 향한다. 생각들 그 이면에는 감정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선 질투, 분노, 불쾌와 미움이 사랑으로 인해 없어지면 생각들은 고요해지고 마침내 그는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게 된다:

 

“이젠 모든 어둠이 지나가버렸기에 나는 보다 건강하고 밝은 눈으로 진리의 빛이신 당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는 있습니다. 나는 당신께 더욱 마음을 열고 신뢰하며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의식의 모든 심연을 당신께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수도승은 기도 중에 반사적으로 자기 자신과 함께 작업을 해야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자아인식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보다 좋은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자아인식을 통해서 기도를 방해하거나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수도승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도를 방해하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간단히 흩어버리거나 억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들을 인정하고 더 깊이 수용할 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철저히 자신을 관찰하고 자아를 거듭 인식할 때 수도승은 참된 기도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안토니오는 수도승은 자기자신을 필히 알아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우리가 방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기까지 자신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다.”

 

그레고리오는 베네딕도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그의 마음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지 않게 했다.”

 

필로칼리에(Philokalie: 예수 기도에 대한 글을 모은 책)는 자기관찰의 목적을 이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주의를 여러분의 생각에로 향하면 향할수록 예수께 대한 불타오르는 갈망과 함께 더욱 열성껏 그에게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아인식은 기도를 위한 조건이다:

 

그것은 유혹을 낱낱이 알아내고 자기 영혼의 움직임을, 모든 외적 영향들을 주의깊게 지켜보는 것과 같이 기도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생각들과 추구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면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에게 자아인식을 강요한다. 내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 중에 줄곧 분심으로 번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기도 중에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분심들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고대 수도승생활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분심잡념들은 꿈처럼 자아인식을 위해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분심들은 그것들이 암시해 주는 바 때문에 대단히 가치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바에 대해 깨어서 꿈을 꾸는 것과도 같다.”

 

꿈이 우리 영혼의 심층, 즉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 해명하고 있듯이 무의식 속에서 생겨나는 분심들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들은 마음의 경향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것을, 특정한 사람들을, 사건들을 생각한다면 혹은 언제나 같은 문제들이나 계획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대단히 중대한 역추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보다 잘 알 수 있다면 즉시 분심이 사라지고 하느님께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b) 기도는 자아인식에 도움을 준다.

 

자아인식은 기도를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기도는 자신을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기도보다 마음을 더 깊이 파헤치는 것은 없다. 기도를 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에로 들어가고 가장 깊은 내면까지 빛이 비치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앞에 서게 한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행위와 사고를 똑바로 비춘다. 그 빛은 내 행동의 참된 동기와 내 사고들의 이유와 느낌들을 발견하게 한다. 필로칼리에는 성령만이 홀로 참된 자아인식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였다:

 

“오직 성령만이 참된 자아인식을 하게 한다. 그분 없이는 매우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자신을 알거나 그의 내적 영혼상태를 알 수 없다.”

 

기도가 없이는 내 안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아낼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바로 하느님과의 대결을 통해서 나는 내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자아관찰을 통해서 결코 볼 수 없는 바를 기도는 발견하게 된다:

 

예수기도는 마음 안에 깃들어 있는, 숨어 있는 격정들을 살그머니 끄집어내고 유혹자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포로 신세를 발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더 깊은 자아인식에로 인도하는 기도의 능력은 한 인격과, 즉 하느님과 대결시키는 데에 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자아재현(自我再現)이 아닌 우리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은 인격과의 대화이며 만남이다. 그것은 내가 단지 자아관찰 안에서 내 주변을 맴돌고 나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때마다 내가 나를 보다 개관적이고 포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입장을 가능하게 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보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여러 면에서 무지하다: 내가 기도 중에 나를 떠나 하느님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면 이제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하느님의 빛 안에서 보다 더 나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심리학에서 융(C. G. Jung)은 인간의 자아인식을 위한 기도의 긍정적인 기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기도는 인간을 ‘나’와 저승의 ‘너’의 이원(二元)안에 서게 한다. 이 이원은 인간에게 그의 작은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을 다른 견지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일반적으로 늘 깨어서 사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무의식까지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융은 기도를 “자신의 착한 천사와의 대화”(colloqium cum angelo bono)라고 불렀으며, 또한 기도를 자신이 무의식과의 대화로 이해하였다. 이 대화로써 도움이 될 힘을 발전시키고 영혼의 변화과정과 치유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의식 속에서 포로가 된 작은 자아로부터 자기에게로 돌진하는데, 본래의 인격중심에로,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들, 하느님과 인간을 서로 관련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융에게 있어 이것은 자아생성의 과정을 위해서, 개성화를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다. 수도승에게 있어 자아인식은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의 어둔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다. 자아인식은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빛 속에서 내가 나를 죄인으로 인식하고, 내 안에서 그분께 내 마음을 열지 못하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필로칼리에는 자연스런 인식과 기도가 선사하는 자아인식을 구분하고 있다. 자연스런 자아인식에서 나는 나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아본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부패한 본성의 빛 안에서 그는 단지 거칠고 손안에 와 닿을 수 있는 결점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적인 기도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실재성을 볼 수 있도록 시선이 더 예리해진다.

 

하느님의 면전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자아인식은 감추어졌던 것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 또한 눈을 뜨게 하고 영혼의 짜임새를 선명하게 바라보게 한다. 교부들은 여기서 의미있는 표상(表象)을 주고 있다: 외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양심은 흐린 물과도 같다. 그 물 속에는 벌레, 뱀, 악의의 악어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흐린 물은 밝은 시력을 가리우기 때문에 아무것도 예측치 못한 사람은 이런 것들을 전혀 깨닫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는 편안하게 자신을 좋게만 여기고 남은 단죄한다. 그러나 빛을 받은 사람의 양심은 그와 반대로 깨끗한 물에 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의 햇빛 안에서 모든 티끌까지도 선명하게 보고 그 티끌 하나하나가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기 때문에 대단한 아픔을 느낀다. 참된 자아인식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결점과 약점들을 - 그것들이 모든 것을 가득 채울 만큼 - 선명하게 본다. 회심과 함께 깊이 스며드는 고통스런 자아인식은 참된 기도를 수반한다.

 

자신에 대한 죄의 인식은 인간이 그로 인해 고통당할 때 비로소 진실된 것이다. 그러므로 필로칼리에는 언제나 깊은 마음의 회심으로부터 수반되는 고통스런 자아인식에 대해서 언급하며 “참되고 격동적인 자아인식” 은 진실한 기도를 필요로 하는 깊은 내적 겸손을 낳는다고 하였다. 오직 그것만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기도하는 자를 교만과 자기영광으로부터 보호한다. 기도는 인간이 자신의 관심에서나 혹은 호기심에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인간의 올바른 자세를 그리고 무한정의 자아인식에로 인도하는 겸손을 위한 것이다.

 

c) 자아인식의 방법인 기도

 

수도승들은 자아인식의 과정을 뒷받침 해주는 기도의 형태들과 방법들 그리고 묵상들을 발전시켰다. 기도는 자연스럽게 자아인식을 위한 특출한 방법이 되었다. 수도승 사부들이 거듭 요구하는 자기반성은 단지 기도 전에 혹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 안에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있는 기도의 기술은 바로 감정을 뛰어 넘어 깨어있는 이성의 순수함으로 모든 종류의 유혹들이 언제 그리고 어디로부터 그리고 어느 정도로 다가오는지 깨어 지켜보는데 있다.

 

자신을 관찰한다는 것은 이미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고, 그의 생각들을 후에 하느님의 입장에서 물어보는 가운데 기도를 하게 된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역시 한 수도승에게 권고했을 때 이같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관찰하고, 그것의 시간을 알아내고, 그것의 방임, 그것의 헝클어짐, 그와 관련된 것들, 그것의 시기들 그리고 어떤 악마들이 작용하고 있는 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그 이유들과 원인을 알 수 있도록 갈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대화 속에서, 즉 기도 안에서 수도승은 그의 생각들의 원인과 배경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하느님과의 대화는 단지 준비일 뿐 아니라 이미 기도 자체이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갖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서 하느님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 앞에 자신의 삶을 펼쳐 놓아야 한다. 여기서 인간이 기도의 주제가 된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하느님을 인간적인 자기실현의 한 수단으로서 격하시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기도의 보다 큰 목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에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앞에 먼저 그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그냥 드러내 놓아야 한다. 먼저 그가 대화 속에서 자신이 본래 누구이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더 이상 경건한 가면 뒤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하느님이 자신에게로 다가옴을 수락하고 피부로 느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도록 하는 가운데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까시아노(Cassianom +453년경, 서방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승 저술가의 한 사람)역시 기도 안에서 인간 자신이 주제였던 기도형식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승들이 매일의 묵상 안에서 모욕을 견뎌내며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반응을 특정한 상황 안에서 묵상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모욕, 수치, 불의를 실감나게 눈앞에 그릴 때 그의 마음 안에서 어떤 감정들이 유발하는지 진지하게 관찰할 것이다. 그는 그의 마음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평가하거나 표하지 않은 채 관찰자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객관적인 관심이나 호기심이 영혼의 충동을 알아내려고 그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에게서 원하시는 자세를 실행하려는 원의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도승이 겸손과 온유의 자세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욕과 수치를 묵상함으로써 수도승은 인내와 온유를 연습해야 한다. 그는 묵상 안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에도 유연하게 그리고 인내롭게 반응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이런 상황들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자아인식은 치유에 도움이 되고 치유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결점 안에서 자신을 자주 알아볼수록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할수록 그는 거기서부터 더욱 빨리 치유될 것이다. 까시아노는 우리에게, 우리가 끊임없이 분심 속에서 그것을 물리치려고 투쟁할 때 우리에게 더욱 빨리 치유제가 주어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을 거듭 상상할 것을 권유하였다.

 

여기서 까시아노가 권유하는 방법은 융(C. G. Jung)이 발전시킨 적극적인 상상과 확연한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것들을 유발시킨 감정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꿈의 영상을 계속해서 상상하던지 아니면 순간적인 감정상태로 적나라하게 빠져들어가 무의식적인 내용들을 의식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파괴적인 감정들과 원인들에 대항하고 상상을 통해서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데 있다. 이같은 상상은 융에게 있어서도 ‘종교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존경심이 가득하고 양심적인 ‘성스러움’(Numinosen)의 고려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까시아노에 의하면 수도승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즉 심판하고 시험하는 하느님의 눈 아래서 상상해야만 한다. 그러는 중에 그는 자신의 잘못된 태도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느님께 청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길 때 하느님의 은총만이 치유시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아인식은 단지 내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을 향해 시선을 두는 데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아인식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이웃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타인을 위한 기도 중에 우리는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그만두고 하느님의 빛 안에서 다른 이를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빛 안에서 우리가 다른 이에게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볼 수 있게 된다. 모욕을 준 형제를 위해 드리는 기도는 곧 자신의 병을 알 수 있는 방법임을 한 사부의 금언집에서 볼 수 있다. 내가 타인의 결점만 더 이상 보지 않게 되면 즉시 나는 자유로워지고 내 자신과 내 잘못을 알게 된다. 베네딕도 성인은 찾아오는 손님과 함께 평화의 입맞춤을 하기 전에 기도하라고 권유한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야 비로소 “악마의 속임수”를 분명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기도는 내게 모든 선입견과 내 적의의 이유를 알게 하고 타인을 귀하게 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선사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깊은 내면에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타인의 모든 어둠과 악이 우리 자신 안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기도를 드릴 때 모든 탓을 다른 이에게로 미루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그와 반대로 그가 자기 처신으로 남의 거부와 단죄를 초래할 때 우리 자신에게 탓이 있음을 더욱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인간이 무엇보다도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탓이 있다는 수도승의 인식을 조시마를 통해 거듭 알려주고 있다:

 

오직 한 가지 구제가 있다: 네 자신이 인류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라. 친구여, 네가 모든 이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해 솔직히 책임을 진다면 네가 참으로 모든 이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잘못이 있다는 것을 즉시 시인하게 될 것이고 또한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빛 속에서 타인을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약점들을 다른 이에게로 더 이상 돌리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위한 기도는 감정전가를 포기시키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알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동시에 기도는 다른 이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도록 남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는 타인에 대한 보다 나은 인식에로 인도한다.

 

자아인식에로 인도하는 또 하나의 기도 방법은 ‘감사’이다.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서 거듭 이 방법을 권하였다. 그는 수도승들에게 어려운 상황들을 해명하지 않고 모욕과 거칠음을 감사하라고 요구하였다. 감사함으로써 수도승들은 하느님이 그것을 통해 무엇을 원하시는지, 자신이 하느님의 뜻과 화합하고자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제 40장 “음료의 분량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포도주가 없다면 수도승은 왜?라고 묻는 대신에 하느님께 감사할 것이다. 문지기는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 그가 마음에 들든지 안들든지, 혹은 적당한 때에나 부적당한 때에 오든지 간에 “Deo gratias!- 하느님께 감사”하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선입견을 갖지 않고 다른 이를 만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대로 모든 것을 감사로이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하느님께 내 삶의 좋은 것이나 고통스런 것 뿐 아니라 모든 사건을 감사할 때에 나는 내 과거와 더불어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오직 내가 받아들인 것만을 나는 참으로 알 수 있다. 내가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원하신 자로 받아들일 때 나는 스스로 나를 알 수 있다. 그러면 나는 하느님이 나와 더불어 무엇을 계획하셨는지, 또 내 안에서 형성되어야 할 상이 어떤 상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원칙은 많은 사건과 잘못된 상황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내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기를 단념할 때 그리고 그 대신 하느님이 내게서 요구하신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할 때 비로소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내 자신이 해결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감사로이 하느님의 선의에 신뢰한다. 이 신뢰는 자신의 힘이나 지력에서가 아니라 은총에서부터 오는 인식에로 인도한다. 내가 패배당할 것 같은 순간을 감사하고 나와 부딪히는 이웃을 위해 감사하는 것을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께 이런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내가 어디서 하느님을 거역하는지 또 내가 어디서 하느님을 억지로 내 상상 안에로 끌어들이려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감사 안에서 나는 내 스스로 만들어 낸 하느님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종종 내 자신에 대해서 고통스런 진리를 드러내 보이실 하느님께 나를 맡기게 된다.

 

[코이노니아, 제17집, 글 안셀름 그륀(Anselm Grun, O.S.B)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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