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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나폴리에서 이루어진 두 가지 중요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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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3-19 ㅣ No.513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나폴리에서 이루어진 두 가지 중요한 만남

 

 

토마스 아퀴나스는 1239년 다른 보통의 입학 연령보다 대략 두 살가량 어린 나이에 나폴리대학에 진학했다. 이를 통해 토마스는 서구에서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초기의 대학에서 본격적인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대학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

 

11-12세기에 늘어난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부가 축적되면서 서구에서는 교육의 기회를 찾는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다양한 형태의 조합(길드)에서는 생산한 것들을 넓은 지역에서 판매하면서 셈법과 계약서 등 여러 가지 지적인 능력이 요구되었다. 기존의 수도원 학교, 궁정 학교, 주교좌성당 학교 등은 이 새로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수공업자와 상인의 자제를 교육시키려는 개인 학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새로 생긴 학교끼리 경쟁이 과열되자, 아주 유명한 교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사는 안정되게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 개인 학교의 교사들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12세기 말부터 거대한 조직이 탄생했다. 바로 ‘교사들과 학생들의 연합체’(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 곧 ‘대학’(University)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새로운 연합체에서 교수들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 연구와 강의를 집중했다. 학문의 분업화를 통해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각 학문은 훨씬 더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세 대학이 체계를 갖추어 가면서 공통적인 구조가 생겨났다. 어린 나이의  신입생들은  ‘인문학부’(facultas artium)에 입학해서 4-6년 동안 ‘7 자유 학예’를 비롯한 기초 학문과 철학을 배웠다. 인문학부에서 이런 과정을 통해 학사 학위를 취득한 학생들만 신학, 의학, 법학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상위 학부’로 진학할 수 있었다.

 

 

교황청 직속 대학 대 황제가 설립한 대학

 

‘교사들과 학생들의 연합체’인 대학은 기존의 개인 학교가 당했던 불이익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연합체가 구성되면서 대학 구성원들은 개인 학교에 부과되었던 과도한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만일 대규모 대학 구성원이 다른 도시로 떠나면 도시의 재정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대학은 연합의 힘을 통해 대학생의 병역 면제라는 특권도 받아 냈다.

 

새롭게 등장한 대학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도시나 국가는 대학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려고 했다. 이를 벗어나고자 신생 대학들에는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간섭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켜 줄 더 큰 권위가 필요했다. 대학들은 로마에 있는 교황이 자신들을 옹호해 주리라 기대했다. 실제로 당시 각 대학이 ‘교황청 직속 대학’으로 인정되었을 경우, 외교적인 면책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등 대부분의 초기 대학들은 학칙도 갖추지 못한 채 출발했기 때문에 정확한 설립 연대를 알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폴리 대학은 1224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황제에게 봉사할 수 있는 지성적이고 명민한 젊은이들을 키워 내는 것’을 목표로 세운 최초의 국립 대학이었다. 교황과 권력을 다투던 황제가 ‘교황청 직속 대학’에 대항하려고 스스로 대학을 세운 것이다.

 

당시 교황청의 지도 아래에 있던 파리대학 등 유럽의 주요 대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황제의 주도 아래에 있던 나폴리대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더욱이 당시 나폴리대학에는 우수한 인문학부가 있어서 ‘7 자유 학예’와 철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가 있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형이상학을 포함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토마스는 번역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이탈리아 남부와도 가까운 나폴리대학에서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한 기초 학문(논리학과 문법학 등)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는 나폴리에서 일생의 방향을 더욱 근본적으로 바꿀 또 하나의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었다. 나폴리대학으로 강의를 들으러 가던 토마스는 광장 근처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소박한 옷을 입었지만, 눈빛이 형형한 사람이 대중을 상대로 그리스도교 복음에 관해 설교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 수준과 힘에 감탄한 토마스는 설교를 마친 그를 따라갔다. 그 설교자가 도착한 곳에는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수도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13세기 초, 대학의 등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새로 설립된 탁발 수도회 가운데 하나인 도미니코회 회원들이었다.

 

이전의 수도원들은 대개 기도와 명상을 위해 시골에 세워졌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서 도시들이 발달하면서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자 이들을 사목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더욱이 사제들의 부유한 생활을 비판하는 평신도 운동 등이 유럽을 휩쓸자 이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려면 복음 말씀에 따른 청빈을 실천하는 수도회가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부응하여 거대한 농토와 같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구걸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는 탁발 수도회가 생겨난 것이다. 도미니코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설립된 프란치스코회도 탁발 수도회에 속한다.

 

토마스는 1244년 회원들의 청빈한 생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복음을 선포하려는 열정 등에 깊은 감명을 받아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토마스와 대화를 통해 그가 가진 열정과 지적 능력을 눈여겨보고 기꺼이 그를 청원자로 받아들였다. 마침 도미니코회의 2대 총장이 나폴리 공동체를 방문했다가 토마스가 가진 뛰어난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런데 총장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여러 이론이 충분한 숙고를 거치지 않은 채 난무하는 나폴리대학은 토마스가 교육받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총장은 토마스에게 당시 신학의 중심지인 파리대학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할 것을 명했다.

 

 

파리대학을 향한 어려운 여정

 

그때까지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던 토마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파리로 떠나게 된 사실을 가족에게 전했다.

 

아들이 고위 성직자나 부유한 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던 토마스의 어머니는 그가 탁발 수도회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그녀는 곧바로 기사인 형들을 보내 토마스를 납치했다. 그러나 형들은 토마스가 완강히 거부하자 그를 집으로 바로 데려오지 못하고 그 집안의 영지에 속한 탑에 감금하였다.

 

형들의 설득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부하들은 꾀를 내어 토마스를 유혹하려고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왔다. 정결을 서약하는 수도자가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된다면 도미니코회에 입회할 결심도 포기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이 향기를 풍기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토마스는 중요한 결정 이전에 흔히 나타난다는 ‘사탄의 유혹’이라 여기고 주변에 있던 횃불을 들어 여인을 쫓아냈다.

 

형들은 토마스를 집으로 데려와 약 1년 동안 감금한 채,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오히려 자신의 결정을 확고하게 밝혀 마침내 가족의 동의와 축복 속에 1245년 파리로 떠날 수 있었다.

 

당시 파리의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파리대학 근처에 있는 생자크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그곳에는 파리대학에서 가르치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이가 많았다.

 

이처럼 파리대학에는 훌륭한 인재들이 모여들어 공동 작업과 상호 간의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성심대학원장과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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