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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세계의 성모 성당: 서산의 성모 대성당(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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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3 ㅣ No.480

[세계의 성모 성당] 서산의 성모 대성당(서산進敎之佑聖母大殿)

 

 

서산 성모 대성당은 중국의 상하이 서부의 쑹장(Songjiang) 지역 서산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이 성당은 중국 가톨릭교회의 가장 유명한 성지 순례지 중 하나이며, 이 지역 명에 따른 ‘서산의 성모’(?山 聖母)라는 호칭도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며 즐겨 부르는 호칭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서산의 상하이 지역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여 Zo-se라고도 하기 때문에 ‘Zose의 어머니’로도 알려져 있다.

 

중국 중동부 해안에 위치한 상하이 시는 양쯔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기에 내륙으로 통하는 무역항으로 번성하였었고,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왕래하며 무역을 하던 곳이어서 선교사들의 중국 내륙 진출의 교두보로 사용되었기에 중국 가톨릭 문화 또한 융성했던 곳이었다.

 

이 서산에 첫 번째 성당이 세워진 것은 1863년이었다. 1863년 상하이의 예수회 공동체는 서산을 구입하여 은퇴 선교사들을 위한 건물들을 지었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작은 성당을 세워 파리에 있는 승리의 성모의 이미지를 모사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상을 모시고 1868년 3월1일 상하이의 주교인 Adrien Languillat(SJ) 주교가 봉헌했다.

 

그러나 1850년 12월에서 1871년 8월까지 중국 전역을 혼란에 빠지게 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여러 지역에서 교회들이 불태워지고,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이때 상하이의 예수회 공동체의 수장이었던 Gu Zhen Sheng은 서산에 올라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상 앞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우리는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를 청합니다. 만일 우리 교구를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 해주신다면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당신께 대성전을 지어 봉헌 하겠습니다.” 그 후 상하이 지역이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무사하게 되자 그 서원대로 1871년 5월24일 상하이의 교구장 Languillat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하며 성당의 건축을 시작했다.

 

 

태평천국의 난에 폭도들로부터 보호해주신 성모님께 봉헌돼

 

목재들은 상해로부터 배로 실어왔고, 석재는 복건성에서 구입해 가져왔으며, 건축에 소요되는 모든 건설자재들은 인력으로 언덕 정상에까지 운반했다. 그리고 1873년 4월15일 상하이의 교구장 Languillat 주교는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며 서산의 성모님을 상해교구 특별 수호자로 선포 하였다.

 

이 첫 번째 성당은 평면이 십자가모양이었고 중국과 서양 건축의 특징을 혼합하여 건설하였다. 성당의 주 출입구 앞에는 10개의 기둥이 있는 현관을 만들고, 성당 정면 앞에는 8마리의 돌사자가 놓였졌다. 그리고 그 후 1894년에는 몇 개의 부속 건물들이 추가로 건설되어, 언덕 아래 중간 지점에 성모 마리아 및 성 요셉, 예수 성심께 봉헌된 세 개의 경당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개의 기도처는 대성당이 있는 언덕위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세워졌다.

 

그러나 1925년 이 첫 성당의 기초가 불안정 한 것이 드러났고, 크기와 장식적인 측면에서 상해의 다른 성당들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첫 성당을 헐고 다시 새 성당을 짓기로 했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사제이자 건축가였던 Ye Zhaochang(?肇昌(趙祥昌))은 건축의 각 과정을 매우 엄격하게 감독하며 진행했기 때문에 전체 공사를 마무리하기까지 10년이 걸려 1935년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두 번째로 세워진 대성당은 약 1헥타르(3025평)의 면적에, 전체 내부 길이는 55.81m, 너비는 24.68m이고, 높이는 약 20미터이며, 라틴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으며, 고전적인 로마네스크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고, 내부는 모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입구는 북쪽, 서쪽 및 남서쪽에 배치했고, 정문은 남서쪽에 만들었다. 내부 회중석 깊이 동쪽 끝에 위치한 중앙 제단은 옥과 금색 장식으로 장식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중앙 제대위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성모상’이 세워져 있어 신자들로부터 크나큰 공경을 받고 있다.

 

성당의 외관은 주로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마무리 했으며, 지붕의 일부는 중국 스타일의 유약을 칠한 타일로 덥여 있다. 성당의 동남쪽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38m이며 종탑의 꼭대기에는 2톤의 무게에 3.87미터 높이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의 청동상(Zose의 성모)이 세워져 있다.

 

원래의 성상은 1976년 문화혁명 기간에 파괴되어 성상 아랫부분의 용 모양만 남아있었는데 1981년 5월 상하이 인민 정부가 서산 Basillica를 천주교 상하이교구에 반환한 후 성모상이 세워졌던 그 자리에는 단순한 철제 십자가를 세웠다. 그러다 2000년 4월 원래의 형태대로 성모상을 다시 만들어 설치하고 상하이 교구장 Aloysius Jin Luxian 주교가 축복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축일에 중국 전역에서 순례자 모여들어

 

이 서산의 성모상은 그 형태가 독특하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 모양으로 양 팔을 뻗은 아기 예수를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이 모습이 행운을 나타내는 ‘Fu’(福)라는 중국의 글자를 연상시키는 모양이기에 그 상징 때문에 열심한 신자들은 성모님을 행운을 가져다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마리아는 자신의 발로 용을 밟고 서있는 모습으로 요한 묵시록의 묘사한 것과 같이 성모님께 패배한 악마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 두 번째 성당은 중국의 공산화 후 문화혁명 기간에 심각하게 파괴되어 스테인드글라스 창들과 십자가의 길의 조각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종탑 꼭대기의 성모자상(像)과 여러 성상 등의 예술품들이 손상을 입었지만 성당이 가톨릭 공동체로 반환되면서 다양한 복원 작업을 거쳐 원래의 모습을 많이 회복했다.

 

1874년 교황 비오 9세는 5월 성모성월에 서산을 순례하는 이들은 전대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결과 매년 5월, 특히 24일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축일이면 중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서산에 모여들어 산 위의 성당까지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며 올라가 이 성스러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어부들이었기에 배를 타고 순례 여행을 왔으므로 5월이면 서산 주변의 작은 항구들은 종종 순례 오는 배들로 붐빈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이 서산 성당에 교회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주요성당에 부여하는 호칭인 바실리카라는 명칭을 하사하셨고, 1946년 교황께서는 탑 꼭대기에 있는 Zose의 성모상에 왕관을 하사 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로 상하이 교구장 이냐시오 쿵 핀 메이 주교(후일 추기경)가 중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30년 이상 수용소에 투옥되고, 이 바실리카는 상하이 인민 정부가 몰수했다가 현재는 바티칸이 인정하지 않는 중국인 주교와 중국 애국 천주교 협회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2007년 5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중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며 매년 5월24일 서산 대성당에 모셔진 ‘모든 그리스도교인들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을 중국의 교회를 위한 세계기도의 날로 기념하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008년 5월2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산의 성모를 위한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0월호,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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