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7일 (목)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성경자료

[신약] 예수님 이야기20: 레위를 부르심, 논쟁을 벌이시다(루카 5,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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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04 ㅣ No.3741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20) 레위를 부르심, 논쟁을 벌이시다(5,27-39)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려 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 유다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동족들이 유배지로 끌려간 쓰라린 체험을 되새기며 단식하고 기도했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 이른바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유다인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드십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와 어울려 식사하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비에 단호하게 반박하십니다.(5,27-39) 차례로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5,27-28)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잔치를 베풀고 세리들과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 직접 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겁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5,29-30)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세리와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세리를 죄인으로 여겨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면서 등쳐 먹는 일이 많아 사기꾼으로 본 것입니다.(3,12 참조) 그래서 세리를 창녀와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그 세리와 어울리는 이들도 자연히 죄인처럼 취급당했지요.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 제자들에게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비난을 일축하십니다.(5,31-32)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시비로 시작된 논쟁의 1라운드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판가름 나버렸습니다. 그들은 더 할 말이 없어 머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시비를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5,33) 

 

단식은 당시에 신심의 중요한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배라는 치욕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며 애도하는 단식과 함께 참회와 속죄, 탄원을 위해서도 자주 단식했습니다. 경건한 유다인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이면 단식하고 기도했지요. 아침저녁으로 단식하고 때로는 일주일씩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질문 방식이 묘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만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5,33)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들이 경건한 유다인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하하고 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답변하십니다.(5,34-35)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성경에서 신랑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이사 54,5-8; 61,10; 예레 2,2; 31,3 에제 16)을, 때로는 미래의 메시아 임금(시편 45,7-8; 히브 1,8)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또 혼인 잔치는 종말에 있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랑으로, 곧 하느님께 버금가는 이나 메시아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운명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대시면서 앞으로의 당신의 운명도 언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치지 않고 비유를 더 들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반박하십니다.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헌 옷이 찢어지고 헌 가죽 부대가 터지기 때문이지요.(5,36-37) 이 말씀에는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고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생각은 낡은 관습이라는 지적이 함축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5,39) 옛날 습관, 옛날 사고방식, 옛날 생활 태도에 젖어 있는 사람은 새로움을 거부한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새로움을 거부함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는 일을 마치면서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 특별히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은 마을 주민에게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 능력을 신기하게 여기며 가르침을 받고 병을 고치려고 모여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점점 퍼져 나가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 다른 한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로 갈릴래아뿐 아니라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도 왔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예수님이 마뜩잖았겠지만 처음에는 속으로만 삭입니다.(5,21 참조) 그러다가 예수님께 직접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제자들에게 투덜거리더니(5,30 참조), 마침내는 예수님께 직접 변론을 제기합니다.(5,33)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점점 노골적이고 적대적이 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을 직접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을 빗대어 비난하지요. 이들이 앞으로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할지가 자못 궁금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 각종 사연이나 탄원을 담은 꼭지들이 벽 틈새에 꽂혀 있다.

 

 

생각해봅시다

 

세리와 창녀를 죄인으로 여겨 상종하지 않았던 당시 유다인의 일반적인 행태에서 본다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지적을 비난할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 있고 새로운 가르침과 능력에 신기하고 놀라워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율법에 관해서 최고라고 여깁니다. 하느님에 대해 자신들의 권위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잣대에 맞춰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업을 재단하려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이런 행태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는 아닌지요?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내가 가진 기존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를 예수님의 말씀에,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거나 외면하려 하지는 않는지요? 그러면서 자기를 합리화해 “묵은 것이 더 좋다”고 말하지는 않는지요?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사인 예수님, 치유자이신 예수님으로 믿고 그렇게 의탁하고 있는지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인데,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을 신뢰하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2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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