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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목] 난민문제와 교회의 연대: 난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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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2 ㅣ No.965

[경향 돋보기 - 난민문제와 교회의 연대] 난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현대의 난민 역사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난민은 베트남전쟁 뒤 ‘보트피플’이라 불리며, 그들이 대양을 떠돌던 모습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일반적인 의미로 인종이나 종교 또는 정치적이거나 사상적 차이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생활이 곤궁한 사람들과,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곤궁에 빠진 이재민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주로 인종적, 정치적 이유로 집단적 망명자를 포함하여 난민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난민이 발생한 사례를 보면, 러시아혁명 기간에 약 150만 명의 난민이 러시아를 떠났고, 1934년 독일의 나치정권이 수립되자 반체제 인사들과 유다인을 비롯한 나치의 피해자 약 250만 명의 난민이 독일을 등지고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1947년 인도의 분열과 팔레스타인 분열, 1948년의 팔레스타인전쟁, 1975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 등지의 난민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1998년부터 시작된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군의 인종 청소 때에는 78만에 달하는 주민이 학살을 피해 국외로 탈출했습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로 드러난 시리아 난민은 시아파(알라위파 : 정부)와 이에 반대하는 다수의 수니파(반군)간 내전으로 피폐해진 조국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4년 넘게 지속된 시리아 내전으로 1천여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2013년 6월, 유엔에 따르면 사망자가 십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내전이 계속되자 이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운 수니파 반군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동부와 북부를 장악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등 악행을 일삼아 시리아 국민의 고통은 더 심해졌습니다.

 

 

난민에 대한 여러 대책

 

이러한 난민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출과 원조에 나서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으로 난민이 발생하자 국제연맹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을 난민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신분증(난센 여권)을 발급하였고, 1939년에는 국제연맹에 독일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두어 난민 보호에 나섰습니다.

 

또한 1946년 유엔은 산하에 국제난민기구를 설치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 피해를 당한 난민과 정치적 추방자를 보호하고 구제하고자 난민이 원하는 나라에 정주시키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그 역할이 끝나자 1951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를 설치하여 난민 보호를 위한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 취임 뒤 아프리카 난민들의 이탈리아 관문인 람페두사 섬을 찾으셨고, 지난 4월에는 난민들의 주요 행선지 가운데 한 곳인 그리스 레스보스 섬을 방문하시어 시리아 난민 가족을 바티칸에 데려오기도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유럽 각국에 전쟁과 기아에서 탈출한 난민을 환대할 것을 자주 촉구하시는 등 난민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오셨습니다. 교황님은 얼마 전 교황청의 조직을 개편하시면서 유럽의 최대 문제인 난민만큼은 당분간 직접 맡기로 하셨습니다.

 

 

난민들이 선호하는 나라와 그 이유

 

독일의 연방노동청(BA) 산하 ‘노동시장 및 직업조사연구소(IAB)’가 진행한 조사에서 난민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독일을 선택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이란 출신의 한 부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독일은 인간을 보호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라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시리아 출신의 응답자는 “독일은 교육의 질이 우수하고, 뒤늦게 일자리를 가지더라도 좋은 일자리를 가질 기회가 주어진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난민들은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면 문화 차이뿐만 아니라 독일어도 극복해야 합니다. 어학교육 이수증을 받는 것이 쉽지 않고,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의 국가 간 학업 인증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들이 독일에서 빠른 시일에 정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자국을 탈출한 난민 신세지만 자국에서 모두 열심히 일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되도록 빨리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에서 인간답게 살겠다고 다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난민에 대한 우리나라의 좋은 예화

 

1985년 11월 14일 전재용 선장이 이끄는 광명 87호는 1년 동안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다섯 시쯤 남중국해를 지날 즈음 전 선장은 구조(SOS)를 외치는 조그만 난파선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베트남 보트피플’이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국제 미아 보트피플을 만난 선장은 ‘관여치 말라.’는 회사의 지침과 양심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채 배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떠나가는 배를 보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보트피플, 바로 그때 선장은 그들을 구하려고 뱃머리를 돌립니다. 파도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작은 보트 안에는 사흘을 굶은 채 엉겨 붙어있었던 96명의 베트남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선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각오로 96명의 구조 소식을 회사에 알리고, ‘부산항까지 열흘’을 다 같이 버티기로 합니다. 선장은 먼저 여성과 아이들에게 선원들의 침실을 내주고, 노인과 환자는 선장실로 데려와 치료하고 보살핍니다.

 

선장은 한국 선원들 25명의 열흘 치 식량과 생수를 96명의 베트남인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선장은 난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우리가 잡은 참치가 많으니 안심하세요.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난민 대표였던 피터 누엔이 가족 생각에 슬퍼할 때마다 선장은 극진히 위로했습니다. 드디어 부산항에 도착한 이들은 난민소에서 18개월을 지냅니다. 그 뒤 피터 누엔은 전 선장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한 채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은인인 전 선장을 17년 동안 수소문한 끝에 찾게 됩니다.

 

전 선장의 첫 답장을 받고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편지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한 즉시 전 선장은 회사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으며, 난민 구출 이유로 당국에 불려가 조사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 선박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가 멍게 양식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내용은 더욱 뜻밖이었습니다. 보트피플을 구조할 때 자신의 앞날과 경력까지 희생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에 적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96명의 생명을 살린 저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드디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피터 누엔과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전 선장을 기다렸습니다. 한눈에 선장을 알아보고 뛰어나가는 피터 누엔, 19년 만의 극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피터 누엔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19년 만입니다.” 베트남 난민들이 직접 전 선장을 유엔(UN)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난센상의 후보로 추천하였지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며 거듭 사양하였습니다.

 

사실 그날 베트남 난민들은 25척의 배들로부터 외면당한 뒤 26번째 광명 87호 전 선장에 의해 구조된 것입니다.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생명을 선택한 전재용 선장과 같은 소수의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반(反)이민 정서를 뛰어넘자

 

난민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만나서 서로 성장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데,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불안감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이슬람문화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폭력적인 사태를 통해 증가됩니다.

 

최근 프랑스의 자크 아멜 신부가 피살된 뒤 난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더 커졌지만, 교회는 성숙한 태도로 아멜 신부의 장례미사에서 이슬람 신자 100명과 함께 애도했습니다. 이슬람 단체는 희생자 가족을 돕겠다며 모금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에 대한 조약인 더블린 조약은 최초에 도착한 국가에서만 난민 지위를 신청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난민문제를 해결하려고 유럽연합(EU)은 자국의 국경을 강화하고 있으며 난민이 자국 내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최초에 도착한 곳에 책임을 떠맡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 사진 한 장이 폐쇄적인 유럽의 마음을 움직여 영국의 전 총리 케머런은 5년 동안 2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자국 이기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인색합니다. 유럽연합이 난민신청자의 30%를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대한민국은 거의 4% 수준입니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대한 사회적 우려도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는 난민정책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유럽연합의 우익 정치가들도 같은 이유로 난민정책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회문제도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첫자리에 교황님이 계십니다. 교황님은 전 세계 사람들이 조금씩만 나눔을 실천하는 가운데 생존을 위해 집을 나서는 사람들을 환대한다면 모두가 살 수 있다고 언급하십니다.

 

지난 7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도 교황님은 관용, 감사,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자비심은 자신이 편하고 익숙한 영역에서 안주하는 것을 넘어서려고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심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집이 없거나 집을 잃은 난민들의 집이 됩니다”.

 

우리 모두 자비의 해에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교황님의 말씀이 난민들에게는 복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프랑스의 칼레 주민들도 시위를 하며 난민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였고, 난민이 영국으로 건너오지 못하도록 철책을 높이는 데 영국 정부도 많은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지중해에서 표류하는 난민 구조를 위한 예산은 삭감하면서 장벽을 치는 예산은 지원하는 자세는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이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난민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좁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땅과 환경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 옥현진 시몬 - 광주대교구 보좌주교(총대리).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과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1월호, 옥현진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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