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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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최해성 요한과 최 비르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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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8 ㅣ No.577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 최해성 요한과 최 비르지타

 

 

2001년부터 한국교회는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02-460-7669)를 설치하고 초기 순교자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 동료 123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달부터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124위 우리 신앙선조들의 순교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과 다달이 만나게 되어 기쁨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교회 순교자 기록을 담은 서한을 스승 신부님에게 올리면서 “삼천리 강토를 아름답게 꾸민 수많은 순교의 꽃들 가운데 어느 곷다발을 먼저 드릴까요?” 하고 물은 뒤에, 부모님 이야기 다음으로 철저한 증언을 바탕으로 먼 친척인 최해성 요한에 대한 순교 기록을 올립니다. 저도 제가 몸담은 원주교구 지역에서 순교한 최해성 요한(1811-1839년)과 그의 고모 최 비르지타(1783-1839년)를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사의 은총으로 순교를 열망하며

 

최해성이 지금으로부터 168년 전에 살았던 곳은 서지 마을(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입니다. 서지 마을을 몇 차례가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 신앙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이곳으로 이사 온 그는 극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힘닿는 대로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착한 표양은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 교우촌에 오신 선교사 신부님에게서 성사의 은총을 받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요한의 열정을 본 신부님은 그를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어려운 사목생활에서도 사도적 활동의 보람이요 화관은 하느님 은총에 충실한 신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성사를 집전할 때마다, 성사에 참여한 이들을 볼 때마다 요한과 같은 열심과 기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뒤 성령칠은(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용기와 통찰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아있는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바칠 의욕이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전통적인 가르침대로,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히 일치하는 방법이고 모범이신 그분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원주 고을을 통째로 준다 해도

 

최해성은 1839년 1월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원주로 압송되었습니다. 당시 무장한 포졸한테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배교를 강요하며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하자 다른 순교자들처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관장이 “네가 하느님을 배반하면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되겠고, 모든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며 상금까지도 보태줄 것이다.” 하고 유혹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원주 고을을 통째로 준다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님을 결단코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용감한 말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격언처럼 널리 전해졌습니다.

 

부활대축일 이튿날 관장이 “네가 정말 죽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관장이 “이렇게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된다는 말이냐?”고 묻자, “하느님 나라로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곤장과 편태, 주리 등 고문을 당해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져 드러났으며, 창자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져갔고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사랑은 사랑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희생 자세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으로, 순교하는 것은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결국 1839년 음력 7월 29일 2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조카를 면회하러 갔다가 순교의 길로

 

최 비르지타는 최해성의 고모입니다. 그녀는 친아들처럼 사랑하던 조카를 면회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배교를 거부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옥에서 조카의 순교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후 넉 달 동안 원주감옥에 갇혀 있다가 음력 11월 초순 옥리들 손에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죽음을 목격한 옥리의 어머니는 한 신자에게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원주에 새로이 복원된 강원감영을 보노라면 그 감옥 안에서 용감했던 순교자 최해성과 최 비르지타의 모범적인 신앙과 순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경향잡지, 2007년 1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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