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최필제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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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8 ㅣ No.576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 최필제 베드로

 

 

2월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탄 대축일 후 40일째가 되는 이날은 요셉과 마리아가 모세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려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 뜻 깊은 날 여러 수도회에서는 수도자들의 첫 서원과 종신서원식을 거행합니다.

 

207년 전 ‘주님 봉헌 축일’은 1800년 12월 19일(음력)이었습니다. 이날 새벽 최필제 베드로(1770-1801년)는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폐해가 심한 투전(노름)을 단속하던 관원들이 투전판을 벌이는 줄 알고 이 모임 장소에 들이닥쳤습니다. 투전 흔적을 찾지 못한 관원들은 가택과 몸수색을 하여 첨례표(전례력)를 발견하고는 집주인인 최필제를 관가로 끌고 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며 전교를 하고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던 최필제는 1790년에 이존창 루도비코에게서 천주교를 배웠고, 정인혁 타데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함께 모여 교리를 익혔습니다. 그런데 1791년 신해박해 때 사촌형인 최필공 토마스와 함께 체포되어 형조에서 엄한 형벌을 받고, 부친에게도 갖은 회유를 받으며 버티다가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밖으로는 전향한 듯했으나 안으로는 바꾸지 않은 그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1793년 이후 다시 약국을 열면서 아침저녁으로 황사영 등과 함께 교리를 익혔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형조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1793년에 신자들이 저의 약국에서 약을 짓는데, 어의(語義)가 여느 사람과 다르므로 서로 벗하기를 허락했습니다. 몇 차례 와서 만나다가 말이 사학(천주교)에 이르자, 서로 칭하기를 좋은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리와 그림자가 서로 따르듯 했고, 사학을 심하게 믿었습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김이우 바르나바 집에서 교리를 배워 익혔고, 주 신부가 거행하는 미사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늙은 부모님을 모시며 살던 그는 성품이 진실하고 후덕했으며, 그의 약국은 약값이 싸면서도 약재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약국을 찾는 이마다 모두 그를 믿었습니다. 이 약국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이자 전교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 그에게 약을 지어 간 순교자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인 윤장이 그 까닭을 묻자 총회장 최창현 요한이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천주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사람 마음속의 선악을 살피고 계시는데, 비록 하찮은 약값이라도 함부로 많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그는 정직하게 약재를 구하고 약값을 받았습니다.

 

 

배교한 것을 기워 갚고자

 

그는 참으로 어진 사람이었으니, 진실하고 충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서 바라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어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천주교를 배척하던 사촌 동생도 “천주교 안에는 오직 최필제 한 사람밖에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는 가정생활도 모범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지켜본 주문모 신부는 “부부간에 정절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성공하는 이가 적은데, 그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갈수록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들이다.” 하고 칭찬하였습니다.

 

최필제는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부친의 부음을 옥에 갇혀있을 때 들었습니다. 이때 형조 관리들이 장례 지낼 것을 허락하면서 은근히 달아나도록 암시를 주었지만,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른 뒤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한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한 소원대로 그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32세의 나이로 1801년 4월 2일(음력)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이웃을 살리는 삶

 

최필제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예수님처럼 봉헌하려고 주님 봉헌 축일에 기꺼이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습니다. 가정과 이웃에게 어질게 살면서 약국을 운영한 그의 삶은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살리는 삶이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살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것입니다.

 

순교자 최필제의 삶과 순교를 가슴에 담아 우리도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2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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