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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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서석봉 안드레아, 구성열 바르바라, 최봉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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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574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 서석봉 안드레아 · 구성열 바르바라, 최봉한 프란치스코

 

 

4월 8일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부활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을 온전히 희생제물로 십자가상에서 바치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 파스카의 신비는 인류 구원사업의 절정입니다.

 

 

부활대축일에 체포된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 노래산 교우촌은 태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데, 충청도와 전라도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와서 마을을 이룬 곳입니다. 노래산은 안덕면 노래리와 고와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네 신선이 걸어가는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늙은 신선들이 오는 곳’(老萊山)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봉우리가 엎어놓은 사발 같아 사발봉(743m)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지난 호에 소개한 고성대 베드로, 고성운 요셉 형제와 이번 호에 소개하는 서석봉 안드레아 ·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와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 등이 모두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1815년 부활대축일(음력 2월 22일경)을 기념하고자 함께 모여 기도를 드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서석봉 안드레아 ·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

 

서석봉 안드레아는 구성열 바르바라와 혼인한 뒤 가족과 함께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활대축일에 체포되어 청송의 상부관청인 경주 진영과 대구 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항구히 참아내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1815년 10월에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형벌로 쇠약해진 탓에 대구 감영에서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인 구성열 바르바라는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었으며, 덕행이 뛰어났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바르바라는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과 결혼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남편과 딸과 사위와 함께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자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된 뒤 그곳에서 삼모장으로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 차츰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컸던지 배교할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바르바라를 위로하며 “천주님을 위해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습니다.

 

사위의 권면으로 신앙을 되찾은 바라바라는 갖은 형벌을 꿋꿋이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대구로 이송되어서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옥사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16년 11월 1일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나이가 마흔 살쯤이었습니다.

 

 

장모의 신앙을 지켜준 사위 최봉한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한 그는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다가 주문모 신부님이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어머니는 신부님께 병자성사의 은혜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시골로 내려갔다가 서석봉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뒤 가족들과 처가 어른들을 모시고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되었습니다. 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꿋꿋하여 한시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며 배교하려는 장모의 신앙을 지켜드렸습니다. 대구로 이송된 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 여러 차례 정신을 잃었으나 열심과 용기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1815년 5월경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삶터는 흔적이 없고

 

지난 1월에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을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습니다. 순교자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며 교우들과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우촌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고, 순교자들을 기억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흔적을 남기려 애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이었기에, 또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기에 아무것도 남겨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굶주림과 혹독한 형벌에 굴복하여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들은 노래산 교우촌을 떠나 어디론가 이주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최봉한 순교자의 아내도 살아남아, 부모님과 남편과 함께하지 못한 것을 일생동안 가슴 아파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순교를 증언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죽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부활대축일에 체포된 순교자들은 참된 부활의 기쁨을 얻고자 기꺼이 감옥으로 향하였고 마침내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부활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순교자들처럼 기쁨과 생기가 흘러넘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4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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