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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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최인철 이냐시오와 최인길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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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572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최인철 이냐시오와 최인길 마티아

 

 

지난 호에 소개한 김현우 마태오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들 가운데 형제 순교자가 있습니다. 최인철 이냐시오와 1795년 을묘박해 때 순교한 그의 형 최인길 마티아입니다.

 

 

가족과 임금의 회유에 굴복하였으나 끝내는 순교한 최인철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 이냐시오(?-1801년)는 형 최인길에게서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습니다. 이미 여러 동료들이 잡혀 와 있었습니다. 몇몇 신자들은 심문을 받을 때에 굴복하였지만, 그는 신앙에 대한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뉘우칠 기회를 주고자 사흘 동안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정조는 “대개 중인의 무리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常人) 도 아닌 그 중간에 있기 때문에, 가장 교화시키기 어려운 자들이다.” 하면서, 회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고 이틀이 지나자 노모와 형제들은 배교를 하라며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가족의 눈물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형조에 들어가서 배교하겠다고 거짓으로 진술하였습니다. 다시 마음을 돌려 “비록 매를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증언하였다가 결국에는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였고,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행하지 않는 등 천주교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가족의 호소와 임금의 명령 앞에 굴복하기도 하였지만, 마음속에는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그가 가깝게 지낸 신자들은 김종교, 최필공, 최필제, 황사영, 오현달이었습니다. 특히 황사영의 집에는 해마다 한두 차례 찾아갔고, 최창현과 강완숙의 집에서는 주문모 신부님을 여러 차례 만나 신앙 공동체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외숙모의 집에 있다가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10년 동안이나 깊이 미혹되었던 학문을 참으로 배척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고 분명히 신앙을 증언하였고 관리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역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형조에서 올린 결안(結案)을 보면, “죄인 최인철은 사학을 정도(正道)로 여겨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며, 주 신부를 높이 받들어 도당(徒黨)을 체결하고, 형륙을 달갑게 여겨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1801년 7월 2일(음 5월 2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목자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역관 최인길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는 중국어 역관 출신으로 1784년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실천하였습니다. 1794년 겨울 주문모 신부님의 영입과 관련해서 그는 신부님이 거처할 집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서울 북악산 아래 계동(桂洞)에 집을 마련한 뒤 신부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고, 신부님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습니다. 이듬해 부활절에는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예비신자였던 한영익이 여동생에게서 신부님의 입국 사실을 전해 듣고, 직접 확인한 뒤 포장 이석에게 직접 밀고하였습니다. 이석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게, 채제공은 정조에게 이를 보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해 5월 11일(음) 신부님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신부님에게 알려 곧바로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피신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남아 신부님이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머리를 잘라 모양을 바꾼 뒤 중국인 행세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을 찾는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나요.” 하고 침착하게 대답하고 끌려갔습니다.

 

이때 신부님은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중국어를 할 수 있었지만 최인길의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멋진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의 턱수염은 뽐낼 만한 것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대장은 신부님의 입국을 앞장서서 도운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심문하면서 신부님의 입국 경로와 행방을 알아내려고 온갖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신앙을 증언할 뿐, 다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참 천주님이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정조는 이들을 곧바로 참수하라고 명했고, 1795년 5월 12일 밤에 포도청에서 참수되어 강에 버려졌습니다.

 

최인철 이냐시오는 한때 가족의 호소와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신앙이 살아있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순교한 형 최인길 마티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인길은 목자인 신부님을 양떼에게 남겨두려고 목자 대신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는 양떼를 지키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모범인 예수님의 영예에 동참한 것입니다.

 

[경향잡지, 2008년 8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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