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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16: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하)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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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6 ㅣ No.794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6)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하) :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는 미소 잃지 마세요”

 

 

-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19세기 중반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의 법과생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1813~1853)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도움을 위해 설립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애덕과 봉사 활동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회의를 겪던 청년 오자남은 뜻을 같이 하는 벗들과 함께 1833년 ‘역사 연구회’를 만들어 격동의 사회 속에서 참된 가치가 어디 있는지를 모색하고 토론하며 마침내 사상적 혼돈을 이겨내고 다시금 신앙의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러한 지성적 차원의 쇄신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생시몽주의’라 불리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에 경도된 한 학우에게 받은 다음과 같은 질문은 그를 깊이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때 교회가 위대하였고 선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들의 활동을 알려주면 우리도 당신들을 믿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난한 이들을 물질적으로 돕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정신적으로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활동 단체를 조직하게 되고 이 단체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라고 부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주보성인인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프랑스어로는 뱅상 드 뽈, Vincent de Paul, 1581~1660)는 교회의 평신도나 성직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영적 구원만이 아니라 물질적 가난과 비참함을 덜어주기 위해 개인적 자선행위의 범위를 넘어서 ‘조직적’으로 헌신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에 선구적으로 사회적 애덕활동이 교회의 참 소명임을 보여준 사목자였으니까요.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의 삶과 영성이 오늘에 주는 의미

 

빈첸시오 성인은 프랑스 닥스 지방 뿌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이 살아낸 시대는 프랑스가 유럽정치와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위대한 세기’였지만 동시에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가혹한 시대였습니다. 특히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이 상징하는 종교 전쟁과 상류층의 사치 향락은 수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굶어 죽고, 고아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자아냈습니다.

 

성인의 어머니는 일찍이 그가 사제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했고, 실제로 그는 여러 유력한 은인들의 도움을 얻는 행운 속에 스물이 채 안 된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동기에는 많은 부분 가난한 가정을 일으키려는 세속적 절박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참 후에 스탕달이 소설 「적과 흑」에서 묘사했듯, 그 시대에는 사제직이 가난한 집 출신의 아이가 신분상승을 하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시련과 영적 고뇌를 통해 어느덧 이런 동기를 정화하고 내적으로 회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젊은 시절부터 많은 유력가들의 가정교사 내지는 개인적 지도 신부로 활동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최상류층과의 개인적 친분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유명한 왕비 마고의 자선활동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고, 앙리 4세와 개인적 교류를 했으며, 루이 13세의 임종을 지켜주었고, 당대의 최고 실력자 리슐리에 추기경, 마자랭 추기경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함대 사령관이자 그의 세 아들이 모두 파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던 공디 백작 및 백작 부인과의 친교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상류 사회와의 교류에서 개인적 이익, 명예, 지위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그러한 분위기에 휩싸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저 ‘벵상’씨라고 부르게 하며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난한 이였음을 잊지 않고 평생 가난한 이, 병든 이와 함께하는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맺고 있는 고위층과 귀족들과의 친분을 오직 가난한 이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애덕 행위와 그러한 애덕활동을 위한 단체 조직에만 선용하였습니다. 그는 공디 백작 함대의 겔리선에서 비참하게 일하는 도형수들을 진심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이들, 얼어 죽어가는 버려진 아이들을 돕기 위해 라자로 회와, 애덕의 부녀회, 애덕의 자매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스스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애덕회 일원이 되어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여러 애덕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이 회의 목적이 가난한 이들을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신적으로도 돕는 데 있으므로 위에 말한 가난한 이의 봉사자들은 병이 나은 사람들은 더 착하게 살도록, 죽을 때가 된 사람들에게는 잘 죽도록 준비시키기를 힘쓸 것이며, 이렇게 하도록 전념할 것이다.” 그리고 애덕의 자매회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기도와 미사성제를 떠난다고 해도 거기에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아세요.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하느님을 보고, 그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그가 복음에서 확신한 실천적 삶이었으며, 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인들에게도 큰 힘과 귀감이 됩니다. 절망감이 만연하고 가치관의 혼돈이 심했던 종전 직후의 프랑스에서 성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뱅상씨’(므슈 뱅상·Monsieur Vincent)가 개봉하였고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과 시네마 프랑스 대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휩쓸기도 한 이 영화의 성공은 소명에 투철하며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장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 모습을 얼마나 사람들이 갈구하는지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병고와 싸우면서도 가난한 이와 끝까지 함께하는 노년의 빈첸시오 성인이 젊은 봉사자에게 당부합니다. “그들에게 미소를 잃지 마십시오.” 그저 편안함과 안락함에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각고의 투신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 성인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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