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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이우 바르나바와 김현우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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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6 ㅣ No.571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김이우 바르나바와 김현우 마태오

 

 

명동대성당 안에는 조선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있었던 공동체 모임에 관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말미암아 집주인인 김범우는 귀양을 가서 귀양지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그는 6남 2녀의 장남이었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이우 바르나바와 김현우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갖고 실천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내놓은 용감한 형제

 

김이우 바르나바(?-1801년)는 중인 계급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김의서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무주 최씨와 결혼하였습니다. 맏형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형이 유배를 가게 되자, 여러모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신앙을 지켜오던 그는 1794년 말 주문모 신부님이 입국한 이후 동생과 함께 적극 교회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체포령을 피해 다니는 주 신부님을 위해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교리를 연구하던 노비 출신 이합규(?-1801년)는 포도청에서 진술하기를, “매월 7일(주일)마다 그의 집에서 손덕장, 정인혁 타데오, 현계흠 바오로, 오현달, 이합규 등과 함께 첨례를 지냈습니다. 1800년 6월경에는 그의 집에서 현계흠, 손덕장, 김덕장 등이 신부님을 모시어 아랫사랑 벽장 가운데 예수님의 상을 걸어놓고 장막을 드리우고 방석을 깐 다음, 여러 사람이 천주교 책을 공부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집 여인들은 창 밖에서 엿보고 들으면서 외우고 익혔습니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

 

그의 동생 김현우 마태오(1775-1801년)도 맏형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형인 김이우 바르나바와 함께 열심히 교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단양 홍씨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청에서 진술하기를, “몇 년 동안 최필제, 이용겸, 손경윤, 현계흠, 손준열, 오현달과 형 김이우가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갖고 신부님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매월 7일에는 첨례(축일)을 지내는 도구를 설치하고 예수님의 상을 방안에 걸어놓고 장막과 방석 등의 물건들을 드리우거나 늘어놓은 뒤, 신부님이 주인 자리에 앉고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첨례를 지냈습니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신앙을 자신있게 드러내놓고 살라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공동체 모임을 이합규는 김이우의 집에서 했다고 하고, 김현우는 자신의 집에서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김이우와 현우가 한 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주 신부님이 김이우와 현우 집을 모두 방문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 현우가 형의 죄를 경감시켜 주려고 신부님이 방문한 집이 바로 자신의 집이라고 거짓 진술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두 형제가 쫓기는 신부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공동체 모임을 열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이우는 체포되어 동생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갔습니다. 특히 자신의 집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였고, 주 신부님을 숨겨준 사실 때문에 누구보다도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고,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포도청에서 그해 5월경에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습니다.

 

김현우는 체포될 때, 자식들이 우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 앞에 나타나 길을 가리키고 있던 큰 십자가만을 응시하면서 따라갔습니다. 그는 서소문 밖에서 그해 5월 22일(양력 7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그와 함께 순교한 8명 순교자(최인철, 이현, 홍정호, 강완숙, 문영인, 강경복, 김연이, 한신애)의 시신은 불볕더위와 폭우 속에 버려진 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며칠 지나 매장할 때, 부패한 흔적이 없이 건강한 사람처럼 살이 온전했고, 마치 상처에서 방금 흘러내린 것처럼 피도 굳지 않은 채여서 신자들과 비신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중추적 구실을 한 이들 가운데는 중인 계급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이우와 동생 현우는 중인계급의 서자로 태어났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적극 실천하였고, 온 몸으로 증언하였습니다. 맏형 김범우처럼 두 형제가 자기 집을 초기 교회 신앙 실천의 장소로 개방한 것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아름답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두 형제 순교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을 자신있게 드러내놓고 살라고 재촉하는 듯합니다.

 

[경향잡지, 2008년 7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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