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박상근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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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570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박상근 마티아

 

 

비 오는 어느 날 성지 봉사자 가족과 함께 문경새재를 걸었습니다. 오는 길에 새재 관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원성지를 찾았습니다. 아름답게 가꿔진 그곳에 박상근 마티아(1837-1866년) 순교자가 잠들어 계십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집을 사제의 은신처로 내어주다

 

문경에서 아전(하급관리)이었던 그는 교우들의 어려운 일을 많이 돌보아주었고, 비신자 어린이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으로 달려가 대세를 주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를 만났습니다. 박해 당시 경상도 북부 지역을 사목하던 칼레(N. Calais, 1833-1884년) 신부님과 마티아의 만남과 이별 장면은 칼레 신부님의 서한(1867년 2월 13일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866년 3월 15일경 문경읍에 살던 박 마티아와 그의 매형이 좁쌀을 사려고 겨울철에 눈 덮인 산봉우리 모습이 마치 하얀 천을 씌운 듯이 보여 이름이 붙여진 백화산(白華山, 1,063m) 서북부 중턱에 있던 한실(문경시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칼레 신부님이 숨어있었는데, 교우들은 한실보다는 문경 읍내에 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당시 읍내에는 15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만일 누구의 집에 모신다면, 그 집주인은 신부님을 숨겨주었다는 죄로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매형이 신부님을 모시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결심은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셋은 밤 11시에 길을 떠나 새벽 2시쯤에 문경읍내 마티아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마티아는 큰 항아리와 가구들로 가득 찼던 빈 방을 정리하여 신부님이 눕기에 충분한 자리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추운 날씨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군불을 땔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방문을 열까봐 방문을 잠가두어야 했으며, 식사할 때는 소리가 날까봐 나무로 된 식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둘째 날 밤 10시경 어떤 사람이 신부님의 기침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가버렸지만, 거처가 드러난 신부님은 마티아를 불러 곧 떠나야겠다고 알렸습니다. 마티아는 밤을 새워가며 신부님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포졸들이 올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신부님께 알려드렸습니다.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다

 

다음 날 새벽에 둘은 포졸들이 닥치기 전에 읍내를 떠나 숲이 우거진 산을 가로질러 한실로 떠났습니다. 백화산은 주봉에서 이화령(548m)에 이르는 북서능과 이만봉을 거쳐 시루봉(914m)에 이르는 서능선이 각각 10km에 이를 만큼 높고 깊은 산입니다. 둘은 점심때까지 허기와 갈증으로 고생하면서 험한 산길을 걸었습니다.

 

이때 신부님은 “너무 지쳤으니 마티아는 이 근처 마을을 찾아가 끼니를 들어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티아가 대답하였습니다.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이신 이 산에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행여 한실에 아무도 없으면 어디로 가시려고요?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을 텐데, 거듭 저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저는 참으로 기쁘게 신부님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돌아갈 것을 명하는 신부님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 없이 함께 죽겠다고 대답하는 모습에서 순교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에 신부님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길을 안내하는 그를 위해 떠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신부님의 마음은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마티아도 떠나는 신부님을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한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습니다. 마티아는 신부님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주저앉아 울면서 떠나시는 신부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산골짜기를 헤맨 끝에 한실에 도착한 신부님은 문산(상주시 사벌면 퇴강리) 교우촌과 연풍에 갔다가 삼박골(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로 갔습니다. 5월 말경 목촌 소학골(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갔다가 10월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상해로 건너갔습니다. 마티아는 집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겨울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이송되었고,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명백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실망하는 이들이 있으면 권면하였습니다.

 

1866년 12월 숙모 홍 마리아와 함께 상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순교 직전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그의 무덤은 1983년 초 안동교구 김욱태 레오 신부님에 의해 마원1리 박씨 문중 산에서 발견되었고, 유해는 1985년 9월 15일 현재의 위치인 문경시 문경읍 하리 2-1에 조성된 새 무덤으로 이장하였습니다.

 

박해를 당하여 쫓기는 사제를 보호하고자 순교의지로 자신의 몸을 던진 마티아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순례 때에 내리던 비는 신부님을 바라보며 끝없이 흘리는 순교자의 눈물 같았습니다.

 

[경향잡지, 2008년 6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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