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심조이 바라바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569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심조이 바르바라

 

 

‘조이’는 성(姓)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쓰여 과부 또는 나이 많은 여성을 젊잖게 가리키는 이두[吏讀]입니다. 한자로는 ‘소사(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이렇게 부르는 분은 네 분입니다.

 

 

어린 딸 이봉금과 함께 순교한 김조이

 

김조이 아나스타시아(1789-1839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남편인 이성삼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원만한 성격 덕분에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았고, 가족이 모두 열심인 신자로서 성가정의 모범을 이루었습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얼마 뒤 이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1839년)를 낳았습니다. 봉금은 신심 깊고 귀여운 작은 천사였습니다. 열 살 무렵에 교리문답과 아침 · 저녁 기도를 배운 뒤, 집을 방문한 프랑스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 마음에 감동하여 신부님은 첫 영성체를 허락하였습니다. 봉금은 부모님의 모범과 가르침에 힘입어 덕행과 신심이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조이는 봉금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습니다. 모녀는 전주에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봉금은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님을 섬겨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느 날 봉금이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자, 김조이는 딸의 신앙을 굳건히 할 요량으로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낼 힘이 없어 배교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봉금은 펄쩍 뛰면서 어떤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포졸들은 봉금이 어리고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이 일어서 목숨을 건지라고 했으나, 봉금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김조이는 전라감사 앞에서 사형선고문에 서명을 하였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때 감사는 “김조이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김조이는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지만, 그해 10월경 옥에서 얻은 병과 형벌을 받아 생긴 상처로 옥중에서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습니다.

 

겨우 여남은 살이었을 어린 봉금은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인간적으로 의지할 데조차 없어졌지만, 천주 앞에서 힘을 얻고 끝까지 그 순교의 결심을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해 10월 30일 밤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봉금을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린 딸은 어머니의 뒤를 따라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습니다.

 

 

젖먹이 아들과 함께 순교한 심조이

 

심조이 바르바라(1813-1839년)는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갇혔던 분입니다. 그녀는 인천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정신연령이 낮았으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시아버지인 홍재영 프로타시오가 유배형을 받아 그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가 집으로 피신해 왔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시아버지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녀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한 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통을 심조이는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형벌로 말미암은 고통에다 이질까지 걸린 그녀는 그해 음력 10월 6일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아들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형선고문에는 “그녀는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7년 동안이나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왔으니, 십자가 앞에서 서약한 것을 진실로 바꿀 수 없으며, 천주교를 믿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달에 순교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가 이룬 성가정을 본받아 거룩한 가정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바쁘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현실이지만, 신앙교육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자녀 신앙교육은 부모님의 모범입니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39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